나에 대한 새로운 정의

나보다 남의 아픔이 먼저 보였던 아이,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by 소구미
나는 내가 괴롭고, 힘든 순간에도 다른 사람의 아픔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나에게 굳어진 너무나 어리석은 습성이라 생각했다.




나는 7살에 엄마가 집을 나갔다. 우리 네자매를 두고. 그날의 몇몇 장면은 30년도 더 되었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전집사님이라 불리던 분은 우리에게 숨으라고 했다. 엄마가 우리를 데려가지 못하게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도록 꼭꼭 숨으라고 하셨다. 일곱살인 나와 다섯살인 동생은 그 작은 두 아이가 들어가도 남지 않을 좁은 공간에 숨어있었다. 작은 틈으로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틈으로 소리도 새어 들어왔다. 나와 동생은 마치 숨바꼭질하듯 숨어있었다. 나는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동생이 울거나 흥분하지 않게 안심시켰다. 신나는 일인 것처럼 꾸며댔다. 동생은 숨바꼭질의 일부로 알고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동생을 지키기 시작했다.

새로운 엄마가 곧 등장했다. 그 시기는 내 기억으론 정말로 빨랐다. 네자매를 지킬 사람이 당장 필요했을까? 엄마가 집을 나간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아빠는 새로운 엄마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내 동생은 경직됐다. 두려워 보였다. 나는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장난감을 예로 들며 동생을 설득했다.
"새거는 좋은거야. 장난감도 새로 사면 좋잖아. 그치?" 그리고 우리끼리 엄마는 둘로 나누었다. 새엄마와 헌엄마. 헌엄마는 안좋은거고 새엄마는 좋은 거라며 계속 동생을 안심시켰다.

20년 전 쯤 집단상담 시간 나는 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뿌듯함으로 나눈 것이었다. 하지만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워하며 슬퍼했다. 그건 지도자분도 비슷했다.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뿌듯한 느낌으로 말하는데 왜 슬퍼하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완전 오반데? 라며 그 집단상담을 무시했다. 그런데도 그 시간에 경험했던 사람들의 반응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긍정적이었다.

그때쯤 부터 내가 아주 어릴때부터 해왔던 지키는 행동들에 그런 감정이 씌워졌다. 어린 아이가 하기엔 너무 힘겨운 일. 안타까운 일. 슬픈 일. 그렇게 오랜시간 그래왔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받고 위로 받았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때 명확히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의 내 정의로움과 사려깊음이 너무 놀랍게 느껴졌고, 내 깊은 내면에 그런 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치만 나는 사람들이 나를 걱정해주는 것이 좋았다. 나를 향해 슬퍼해주면 매우 안심이 되고 따뜻함을 느꼈다. 그래서 마치 게임하듯 그런 내 상황을 이용하고, 사람들의 그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게임처럼 하던 그것이 완전히 나를 덮어버린 사건이 바로 얼마전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성폭력 사건을 경험했는데, 그 일은 나에게 분명히 별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사람들이 한 비윤리적인 면을 고발하는 심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걱정해주고 돌봐주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 돌봄에 압도되었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나의 온몸에 남아있던 어린시절의 아픔과 트라우마가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인생에서 이렇게 아픈적이 있었나. 이렇게 괴로운적이 있었나. 너무 힘들었다. 내가 힘들었구나. 내가 괴로웠구나. 나는 그걸 한번도 알아준 적이 없었구나. 나는 모든 고통을 느끼면서도 참고 있었고, 이제는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게 되었구나.

그런데 중요한 건 이때부터다. 내가 진짜 힘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아픔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나만 생각하라며 왜 자꾸 그 사람들을 신경쓰냐고 했다. 상담선생님, 경찰관님, 우리가족,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계속 알고 있었다. 괴로운 나보다 그들이 더 약해보였다. 그들은 나를 살피지 못했다. 단 한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들을 어떻게 지켜야하나 고민하며, 또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쉼을 가졌다.

왜 나는 괴롭고 힘든 순간에도 다른 사람의 아픔이 눈에 더 들어올까. 왜 나는 나의 아픔보다 그들의 아픔이 더 아플까. 처음에 그것은 나에게 굳어진 너무나 어리석은 습성이라 생각했다. 내 존재를 너무 빨리 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너무 슬퍼졌다. 내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뭔가 부족했다. 그러기엔 꾸밈도 없던 너무 어린시절부터 해왔고, 자연스럽고, 내 감정이 편안하다는 거다. 나는 나를 지키는 것보다 오히려 누군가를 지킬 때 나는 더 자신감있고, 개운하고, 힘차다.

이제 나는 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더 쉽고 편안한 정의다. 나는 아주 강한 사람이다. 나는 아픔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지키고 보호할때 힘을 얻는다. 그것은 불쌍한 것이 아니다. 내 안의 아주 빛나는 에너지다. 내가 어릴 때 보호받지 못한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이미 힘이 있었다. 나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 보다 두려움이 현저히 적고, 헤쳐나가는 힘이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린시절 받지 못한 보호를 이제와서 억지로 보호받으려 애쓰지 않겠다.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도 정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자연의 질서 회복이기 때문이다.

+ 내가 아파 피를 흘리고 있어도 나에게 다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은 얼마나 약했던 걸까. 그 사람이 회복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