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
친한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는 물론이고,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아직은 어색한 상대방에게도 내가 자주 묻는 질문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순수한 호기심이던, 어색함을 극복하기 위한 아이스브레이킹의 일환이던, 질문을 던진 의도와 무관하게 나에게 너무나도 흥미로운 대화 주제 중 하나이다.
이 질문을 던지면 아주 다양한 영화들이 언급되며 기분 좋은 대화가 이어지게 되는데, 결국 대화의 끝에는 당연하게도 나를 향한 똑같은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의 대답은 언제나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도 한국영화에는 수많은 감독과 작품들이 존재했겠지만,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의 중심에서 주목을 받게 된 시작은 아무래도 박찬욱 감독의 기념비적인 작품 <올드보이>이지 않을까 싶다. <올드보이>를 시작으로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극찬을 받은 작품들로 화려하게 채워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박찬욱의 작품 중 최고는 무엇이냐?"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재미있는 토론 주제이기도 한데, 그 토론에서는 역시나 다양한 작품들이 언급되곤 한다. <올드보이>부터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그리고 최근의 <헤어질 결심>까지 너무나 다양하고 화려한 작품들이 후보로 꼽히곤 한다. 후보로 언급되는 영화들을 곱씹어 보면 하나 같이 "그래 이 작품이 최고작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역시나 박찬욱은 한국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이름 중 하나라는 것을 새삼 깨닫곤 한다.
이러한 대화가 이어지며 여러 작품이 언급되는 중에도 박찬욱 감독의 출세작인 <공동경비구역 JSA>가 언급되는 경우는 웬만하면, 아니 장담컨대 거의 없다. 사람들의 인식에는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훌륭한 작품이고 상업적으로도 큰 결실을 맺은 성공적인 오락 영화이긴 하나, 역설적이게도 그 보편적인 오락성과 상업성이 이 작품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데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하지 않나 싶다. 물론 그 이후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전부 박찬욱의 색깔을 잔뜩 머금으면서 엄청난 평가를 받는 것이 주된 이유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박찬욱 최고의 작품을 논할 때 <공동경비구역 JSA>가 언급조차 되지 않는 야박한 평가를 받을 만한 영화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나는 박찬욱 감독의 필모뿐만이 아니라, 한국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바로 이 <공동경비구역 JSA>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판문점에서 네 명의 남북한 병사들이 금기를 넘어 나누는 진한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금기를 넘었기에 벌어지는 비극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남북관계를 소재로 한 매우 익숙한 스토리이면서, 흥미로운 긴장을 느끼게 해주는 액션 스릴러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의 장르를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 비꼬는, 실랄한 풍자가 담긴 블랙코미디로 정의하기도 한다.
판문점 북한군 초소에서 의문의 총격사건이 발생한 후, 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해 파견된 한국계 스위스인 소피 장(극 중 이영애 扮) 소령은,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수혁 병장(극 중 이병헌 扮)의 신상을 조사하기 위해 그의 여자친구를 찾아간다. 소피 장은 여자친구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이수혁 병장의 평소 모습을 그려내 보고자 노력하지만, 정작 여자친구는 너무나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딱히 소피 장의 이목을 끌만한 정보를 전달해주지는 않는다. 이 여자친구가 이수혁과 함께 군복무 중인 남성식 일병(극 중 김태우 扮)의 여동생이었다는 게 소피 장 소령이 얻은 유일한 소득이라면 소득이겠다.
이 장면은 이수혁 병장과 남성식 일병이 각별한 사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정보를 관객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그려진 평범한 장면으로 보이지만, 사실 곱씹어보면 너무나도 웃기고(?), 어처구니없고(?), 어쩌면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담긴 장면이라고 나는 느낀다.
소피 장이 이 병장의 여자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시점은 이미 북한군 초소에서 발생한 의문의 총격사건이 뉴스를 통해 대서특필이 된 이후이다. 남한에서는 북한군이 납북을 위해 남한군 납치를 시도한 것이며, 납치될뻔한 남한군 병사가 반격을 가하여 총격이 발생하였고, 그리고 인해 북한군 1명 (정우진 전사, 극 중 신하균 扮)이 사망하고 그 남한군 병사는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이미 대중이 알고 있는 시점이다. 물론, 그 납치당할 뻔한 당사자가 자신의 남자친구인 이수혁 병장이라는 사실까지 여자친구가 알고 있는지는 영화에서 그려지지 않으나, 최소 그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자신의 오빠와 남자친구가 군복무 중인 JSA라는 것은 그녀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병장의 여자친구가 소피 장 소령에게 보여주는 태도는 너무나도 비상식적이다. 자신의 오빠와 남자친구가 근무하는 곳에서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하였는데도, 그녀는 너무나도 태연하고 무심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소피 장의 질문에 보는 관객이 무안할 정도로 집중하지 않고 성의 없는 대답을 하면서, 뜬금없이 본인이 입고 있던 놀이동산 인형 탈의 지퍼를 올려 달라고 하지를 않나, 마지막에는 심지어 자신은 이수혁 병장과 그렇게 진지한 사이가 아니다고 말하고는 일방적으로 자리를 떠나버린다.
이 장면을 우리의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되짚어보자. 나의 오빠와 남자친구가(비록 진지한 관계는 아닐지라도!) 군복무 중인 JSA에서 북한군이 남한군을 납치하려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총격적인 발생 했다. 실제로 사망자도 발생했다. 온 세상이 이 얘기를 하고 있다. 평생 볼일 없는 UN군 장교가 대뜸 와서 본인의 남자친구(역시나 비록 진지한 관계는 아닐지라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본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나라면, 그 상황이 너무나 두렵고 걱정스럽고 불안할 것 같다. 이 시점에 왜 UN군 장교가 나를 찾아왔지? 왜 나한테 그 사람에 대해 물어보지?라는 의문과 걱정에서 시작해, 이 사람에게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괜찮은 건가? 그럼 우리 오빠는 어떤 상황인 건가?라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번져나갈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지극히도 무심하고 성의가 없다.
이건 분명히 비상식적인 묘사다.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강심장이고 무던한 사람일지라도, 이수혁 병장의 여자친구만큼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장면이 남북분단의 현실을 살아가는, 그 지독한 현실을 평범함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우리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장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때때로, 아니, 사실은 항상 휴전 중인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가끔 뉴스에서 들려오는 남북 갈등이나 북한의 도발, 그리고 그로 인해 희생되는 군인이나 민간인의 소식을 접하게 될 때가 있는데, 나 역시도 놀라우리만치 요동이 없다. 그냥 "그랬나 보구나, 안타깝네". 그다음은 없다. 분단의 현실, 체재 간의 갈등으로 희생되는 생명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너무나도 무심하고, 차갑다. 마치 이수혁 병장의 여자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갈등과 분단의 현실 자체보다 더 암울하고 차가운 것은 우리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심함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특히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이수혁 병장의 여자친구를 통해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감독이 관객에게 마치 "남북한 병사들의 우정의 결과가 이런 비극이라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시죠? 근데 뭐 어떡하라고요? 여러분들은 애초에 이런 거 관심도 없었잖아요"라고 꼬집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 나의 생각의 비약의 결과 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초반의 끔찍했던 총격전 묘사와 숨 막히는 심문 과정을 잠깐 그려낸 이후 한동안 평화적으로 진행된다. 네 명의 병사들이, 마음속 어느 한편에는 비록 불안함이 자리 잡고 있을 지라도, 뜨거운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진정으로 친구가 되어간다. 서로 술도 한 잔 하고, 야한 사진도 공유하며, 음악을 함께 듣고, 게임도 같이 하면서...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우정의 행위들을 함께 즐기며, 역설적으로 절대 평범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과 이들은 가까워져 간다.
그리고 짧은 찰나이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뀌게 된다. 이수혁 병장의 전역을 앞두고 네 명의 병사들은 서로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임을 알고 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아쉬움과 슬픔 속에서 네 명의 병사들은 서로 침묵에 빠져있다. 그때, 남성식 일병은 평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정우진 전사를 위해 준비한 그림 도구를 선물로 건넨다. 생각도 못한 큰 선물을 받은 정우진 전사는 선물에 대한 고마움과 마지막이라는 아쉬움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부터 올라오는 울컥함을 애써 짓누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고마워요 동무... 형...!"
그 짧은 말은 투박했지만 따뜻했고, 부끄러웠지만 진실이었다. 그리고 네 명의 남북한 병사가 진정으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평생 써온 동무라는 표현보다는, 낯 뜨겁고 어색하지만 남한에서 애정을 담아 부르는 형이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뱉어내며 이들은 진정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 네 명의 병사들은 이제 서로에게 미제 앞잡이나 빨갱이가 아닌, 워게임에서 생존율 0%로 나오는 적군의 병사가 아닌, 진정한 친구 이외의 수식은 존재하지 않고 있음을 선포하는 대사이다. 그리고 정말 슬프게도, 이념을 넘어 진정한 친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그 시점, 그러니까 동무가 형이 되는 그 순간이, 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대사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스토리뿐만이 아니라, 분단의 현실을 살아가는 남북한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로서 마음에 깊고 아린 형태로 박혀버린다.
이후 영화는 북한군 초소에서 벌어진 끔찍했던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며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아온다. 사건의 진실은 결국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진실과 그에 따른 결과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진실의 무게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형태의 압박으로 여전히 작용하였고, 결국 영화는 상당히 비극적인 결말로 끝이 난다. 마지막 장면은 영화 중반, 판문점을 견학하던 한 미국인의 카메라에 우연히 담긴 네 병사의 모습이다. 서로 다른 군복을 입은 이들이 나란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체제의 최전선에서 마주친 이질적인 존재들이, 그 순간만큼은 같은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선의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지만, 아마 그 누구보다 절실했던 평범함이 아니었을까.
<공동경비구역 JSA>는 우리가 익숙한 평범하면서도 현실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이다. 그래서 어렵지 않다.
그 현실적인 소재가 우리만 그려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이다. 그래서 와닿는다.
그러한 현실적인 소재에 더해 적절한 영화적 상상력이 얹혔다. 그래서 흥미롭다.
그리고 현실과 상상이 어색하지 않게 잘 융합시켜 주는 감독의 연출이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전달해 주는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가 있다. 그래서 영화가 완성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동경비구역 JSA>는 지극히 판타지적인 이야기의 영화이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그래서 더 아프고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