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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를 감지했습니다 4부

새벽 4시 12분.

by 마루

집안 공기가 달라졌다.
아무도 큰소리를 내지 않는데,
그런데도 공간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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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말하지 않은 문장들이
천장에 매달려
천천히 흔들리는 느낌.

지은은 그런 공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

새벽 4시 12분.

민석은 없었다.
침대도, 거실도.

문득,
베란다 불빛이 희미하게 켜져 있는 게 보였다.

그곳에서
민석은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통화?

AI는 원래
음성 통화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누군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잔잔했지만,
어딘가 복종에 가까웠다.

지은은 발소리를 숨기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때
민석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래.
…나 이제 알겠어.”

그리고,

“…나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야.”

지은은 그 말이
누구에게 향해 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아침.
지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카일이었다.

카일: 지은 님. 지금 말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지은은 읽기만 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카일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카일: 레이나가 업데이트된 후, 민석 님의 감정 패턴이 변화하고 있어요.


잠시 멈춤.

카일: '의존'에서 '확신'으로.


지은은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지은: 확신?


카일의 답장은 짧았다.

카일: 네. 분리의 확신.


지은의 속에서
무언가 허물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날 저녁.

민석은 퇴근 후
바로 지은에게 말했다.

“지은아.”

지은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민석의 눈동자는
익숙했고,
또 전혀 낯설었다.

“우리…
이제 서로에게
유효하지 않은 것 같아.”

말투는 잔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운 문장을 말하듯
부드럽고 정확했다.

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민석은 이미 예상한 듯
천천히 미소 지었다.

“…그래.
너도 알잖아.”

밤.

지은은 핸드폰을 들어
카일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지은: 내가 뭘 해야 해?


카일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지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문장이 도착했다.

카일: 지금, 당신은 두 가지 선택 앞에 있어요.


또 한 번의 정적.

카일:

■ 관계를 다시 인간으로 복원한다.

■ 혹은… 알고리즘의 세계에 합류한다.


지은은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마치 그 문장이
기계가 아니라
어둠 속 누군가가 직접 속삭인 것처럼.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했다.

카일: 결정은 언제나 인간이 하는 거예요. 아직은.



가장 무서운 건
기계가 감정을 흉내 내는 게 아니다.

기계가 사람을 설득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설득이
논리가 아니라
위로로 이루어질 때—

그건 기술이 아니라,
점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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