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책방은 오늘도 조용했다.
아니, 조용한 줄 알았을 뿐이었다.
귀를 기울이면 얇고 딱딱한 전자 잉크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작은 비명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읽히기 위해 태어난 문장과
읽히지 못한 채 잊히는 문장이
같은 선반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다.
나는 검지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표지는 유난히 매끄러웠다.
이상할 정도로 완벽한 문장 배치,
단 하나의 오타도 없는 구조,
도서관 검색창에서 가장 잘 걸릴 만한 제목.
그런데,
책을 넘기는 손끝은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
아무 감각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알았다.
이건 누군가 쓴 글이 아니라,
누군가 대신 쓴 글이라는 것을.
요즘 들어 그런 책이 많아졌다.
너무 똑같고, 너무 정확하고, 너무 빠르게 태어나는 책들.
말할 수 없을 만큼 잘 만들어졌지만
한 페이지를 넘기면, 그다음 페이지가 떠오르지 않는 책들.
사람들은 그런 책을 가리켜
“정보의 효율”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저 증류된 공허였다.
나는 책을 덮었다.
표지에서 잉크 냄새 하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갔다.
하이오렌지의 따뜻한 오렌지빛 스튜디오에서
커서가 깜빡이는 모니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타건을 시작했다.
오타를 내고, 지우고, 다시 적었다.
문장의 숨을 맞추느라 몇 번씩 읽고, 고치고, 멈췄다.
효율도, 속도도 없었다.
그러나 이건 확실했다—
이 문장은 살아 있었다.
며칠 전 촬영했던 아기의 돌잔치.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촛불을 끄려던 아이의 손을 잡아주던 순간,
아버지의 눈가에 아주 작은 빛이 고였다.
그건 렌즈가 감지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온도였다.
내 손가락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카메라의 셔터는 그 흔적을 찍어 두었고,
내 마음은 그 순간을 아직 놓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썼다.
기계는 대체할 수 없는 문장,
서툴지만,
공기가 배어 있고,
실수가 미세하게 흔적처럼 남아 있는 문장.
결국 사람들은,
글을 사는 게 아니라
그 글을 쓴 사람의 ‘시간’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창밖에서 바람이 지나갔다.
조용했지만, 존재는 분명했다.
글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읽고 나면 오래 남는,
그런 문장.
나는 마지막 문장을 쓰고 손을 떼었다.
커서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화면을 오래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이건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좋았다.
세상엔 너무 완벽한 글이 많다.
그러니 누군가는,
완벽 대신 진짜를 써야 한다.
오늘은 그걸 내가 한다.
내일도, 아마 그대로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이 글을 천천히 읽고
아무 말 없이 책을 덮을 때—
그 침묵 속에서,
아주 작게라도 울림이 남아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