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약 먹어도 될까요?

녹내장과 우울증

by grassrain

저 어린 여자 인간 생명체가 좋겠다. ‘귓바퀴’라 불리는 곳에 착륙하자. 그리고 ‘귓구멍‘으로 침투하자. 그곳은 항상 열려있고 저 생명체의 조종실로 향할 수 있는 지름길이 있다.

내 암기력의 저질 능력은 물론이고 과거의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사십여 년 넘게 살아온 경험으로 봤을 때 어릴 적부터 나의 기억력은 평균 이하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시작했을까. 아주 조그마한 외계인이 인간 세상에 대해 조사하려고 몰래 나를 조종하며 내 안에서 함께 살았던 적이 있다고 심각하게 의심을 한 적도 있었다. 그 작고 요사스러운 외계인의 두뇌는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내가 공부할 때만 내 집중력을 쏙 빼놓고 조종했다가 시험을 치러야 할 땐 절대 도움 주지 않았다. 어린 나이치고 나름 논리적인 의심이었다. 그 외계인은 나의 뇌를 장악했고, 더불어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나의 두 눈까지 넘보았다. 자신의 몸을 내 시신경과 복잡하고 정교하게 얽히게 만들었고, 내가 세상을 보는 대로 바로 자신의 온몸으로 체득하고 백업까지 해놨을 테다. 그리하여 나의 눈과 뇌는 보통 사람들의 능력보다 무리하게 일을 해야 했다. 그런 결과로 난 억울하게도 나의 생활에서 본래의 기능을 다 발휘하진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어린 시절부터 고도 근시와 기분의 큰 변화를 겪어내야 했다.

내 눈 속 절대 강자의 존재를 알아채고서, 그 놈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난 순순히 약자가 되었다. 그놈에게 지배당했다. 별다른 저항 없이 복종했다. 수뇌부를 조종당했기 때문일까. 나의 모든 것이 먹혔다. 일상들 마저 그놈에게 삼켜졌다. 이 기분,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기시감인가. 난 최대한 숨도 조심스럽게 쉬며 잠자코 기다리기만 한다. 마치 곧 샅샅이 파헤쳐지고 분해될 걸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녹내장을 껴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건 버겁고 무거운 짐이긴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살면서 한 번쯤은 겪어 봄직한 일이다. 하늘에 구름이 빈틈없이 그득한 날에 높고 긴 담벼락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난 두 눈을 감고 있는 것뿐이었다. 억지로라도 치켜떠서 앞을 내다보고 어두운 날에 그늘 아래 있는 것뿐이라는 상황을 파악했다면 좀 덜 힘들었을까? 압도적으로 높았고 길지만, 그 그늘의 끝을 향해 걸어갔으면 됐을 텐데… 겁 많은 나는 실명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있었다. 거대한 망상에 내 일상을 낭비했다. 컴컴함 속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을 흘러 보내는 것조차 힘겨웠다. 분명 내 안에 다시 찾아온 조용한 전쟁의 시작을 느끼고 있었다.

안약을 넣는 것 말고는 의사 선생님에게 받은 처방은 없었다. 꼭 챙겨 먹어야 하는 음식도, 꼭 해야 하는 것도 없었다. 열두 시간 간격으로 안약 넣고 2분씩 두 번. 총 4분. 24시간 중 4분을 뺀 남은 시간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시간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기에 숨이 가빴다. 난 시간과 함께 걷지 못했다. 밀려 나와 넘쳐났고 흘려내 버려야 했다. 우울에 빠진 나는 아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만 있었다. 책임감만 강한 엉덩이 무거운 엄마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을 위해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익숙한 집 안에서 안전하게 노는 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생각지 못한 변수가 나에게 나타났다. “엄마는 왜 맨날 잠만 자?”

아이들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엄마 눈이 많이 아파서 그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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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게 치유 당하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내 글을 보이는게 아주 많~이 부끄럽지만 그 누군가에게 나의 글이 작은 토닥임으로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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