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정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학창 시절에는 이것에 '상상게임'이라는 나름 그럴듯한 이름도 붙여서,
"~라는 상황이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해결할 것 같아?" 라던지
"누가 너에게 ~라고 말한다면 너는 뭐라고 대답할 것 같아?"
하는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곤 했다.
그 시절에 나에게 그 시간이 얼마나 즐겁고 귀했던지,
집안의 형광등을 모두 끄고 촛불까지 켜놓고 준비할 정도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나는 여전히 가정을 즐긴다.
다만, 이제는 이름 붙이지 않은 채 대화 속에서 습관처럼 꺼내놓을 뿐이다.
어느 날 누군가 나에게 '너는 왜 그렇게 가정하는 것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듣고서야,
왜 이 행위를 좋아하게 됐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돌아보니,
그 질문들 속에는 늘 진짜 내 마음이 숨어 있었다.
'내가 무심코 뱉은 말이나 행동이 타인에게는 어떻게 비쳤을까'라는 것이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가정을 하고, 대답을 들으면서,
“아, 그렇게 대답하지 말 걸.” 이라거나,
“아, 그렇게 행동하지 말 걸.” 하는
후회를 자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후회를 하면서도 더 확신하게 된 사실은,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말하고 행동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릴 적의 가정은 단순한 놀이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삶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도 습관처럼 떠올리게 된다.
요즈음 의도치 않게 아주 큰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 순간이 오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 나는 그때그때 내가 할 수 있던 최적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 선택들 중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가 앞으로 할 모든 결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지 않을 것.
그리고 미련 갖지 않을 것.
많은 것들을 보내주어야 하는 순간이 왔다.
내 손을 떠난 일과 사람을,
이제는 진심으로 놓아주어야 한다.
공백이라는 것은 단순히 비어있음을 뜻하지만,
여백은 의도적으로 남겨둔 빈 공간을 뜻한다고 한다.
여백으로 남겨뒀던 내가 사랑했던 많은 것들을,
이젠 비워내려 한다.
공백이 된 자리에는, 언젠가 내가 더욱 사랑해 마지않을 많은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