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들어가기 전 마지막 글
내일 입대다. 살면서 머리카락이 이렇게 허전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샤워를 하고 나면 그게 특히 실감이 난다. 머리를 말릴 필요가 없다. 몇 번 털면 금세 말라 있다. 훈련소에 들고 갈 물건들을 가방에 욱여넣고, 입영통지서 한 장을 출력한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프로그래밍에는 '조건문(Conditional Statement)'이라는 기본적인 문법이 있다. 쉽게 말해, 우리가 매일 내리는 결정의 과정을 컴퓨터 언어로 옮겨놓은 것이다. 가장 흔한 조건문인 If/Else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if (만약 이 조건이 참이라면): 이 조건에 해당하는 행동을 실행한다.
else (그렇지 않다면): if 조건이 거짓일 때, 대신 이 행동을 실행한다.
벌써 두 달이 되어간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 먼저 군대에 간 대학 동기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 외엔 대부분 롤토체스를 하며 시간을 죽였다. 과제도, 시험도, 리크루팅도 없으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초반에는 이 시간을 어떻게든 알차게 써보려는 의지도 있었다. 늘 그렇듯 처음 생각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금세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됐다.
객관적으로 평가해선 허송세월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맞다. 군대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계획을 세운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한다든지 생산적인 일을 한 건 아니다. 그래도 만족한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흘려보낼 날들이 거의 없다.
방학 때마다 한국에 종종 들어오곤 했다. 겨울엔 한 달 정도, 여름엔 길게는 세 달 넘게 있을 때가 있다. 방학의 첫 주는 항상 컴퓨터 게임으로 채워 넣었다. 싫증이 날 때까지 게임만 한 뒤에 다시 생산적인 활동을 위한 동기부여를 얻는 식이다. 입대 전이다 보니 루틴이 조금 더 지속됐을 뿐이다.
"빨리 입대 좀 시켜줬으면 좋겠다."
최근 몇 주간 친구들을 만날 때면 항상 하던 말이었다. 가장 이상적인 입대 날짜는 10월 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추석 연휴가 끼어 있어서 모집병 입영 일정이 밀리다 보니 마지막 주가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사회를 조금 더 즐기다 갈 수 있어서 좋겠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대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먼저 나오는 동기들에게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다. (이미 놀려질 만큼 놀려졌다.)
캘린더의 숫자가 9에서 10으로 넘어갔을 때, 마치 나이의 앞자리 수가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낙관적이었고, 군대에 가면 이런저런 걸 공부하겠다고 다짐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순식간에 군대가 실감 나기 시작했다. 왜 내가 군대를 가야 하는지, 강한 회의감과 분노, 그리고 허무함이 밀려왔다.
링크드인에는 나와 같은 커리어 단계를 밟아가던 대학생들이 더 큰 회사, 더 높은 페이의 인턴십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끝없이 올라왔다. 같은 대학교, 같은 학년, 같은 인턴십을 했던 사람은 급기야 자퇴를 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잘 나가는 AI 스타트업 CTO가 되어 있었다.
내가 계속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더라면, 흥미로운 수업을 들었을 것이고, 작년보다 수월하게 인턴십 인터뷰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퍼 중 하나를 고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꿈을 이루기 위해 창업 경진대회나 해커톤, 콘퍼런스에 참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커리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관계로 보더라도,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선배들과 후배들을 뒤로하고 캠퍼스를 떠났다. 대학 생활 2년 내내 가까이 지낸 형들과도 떨어지게 됐다. 지금껏 쌓아온 미국의 프로페셔널 인맥들도 점점 옅어져 갈 것이다.
이 가정법은 이성 문제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올해 들어 관심이 갔던 사람들은 몇 명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나는 이성 관계를 남들보다 비교적 진지하고 길게 바라보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입대를 앞둔 사실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서곤 했다. 내가 나답지 못했고, 내 매력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다. 실패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제대 후의 리크루팅도 걱정이다. 아무리 테슬라 인턴십 경험이 있다고 해도, 2년의 공백을 회사들이 달가워할지는 미지수다. 무엇보다 내 실력이 얼마나 퇴화될지가 가장 큰 걱정이다. 개발자, 혹은 IT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기술과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특히 요즘처럼 AI와 Agent의 발전 속도가 가파른 시기에는, 잠깐만 시선을 돌려도 금세 뒤처지기 마련이다.
여름 인턴십을 하는 동안에는 업무에 필요한 기술과 스택에만 집중했다. 그 외엔 가끔 인턴 동료들이나 회사 사람들을 통해 샌프란시스코의 다양한 AI 스타트업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최신 프론트엔드 기술 블로그를 가끔 읽긴 했지만, 자주 하진 않았다. 그때부터 이미 최신 트렌드를 열정적으로 따라가던 때의 나는 아니었다. 새로 나온 LLM 모델, 실용적인 AI Agent, 구글의 신제품 발표 같은 소식들도 대충 훑어보기만 했다. 놓친 것들이 많았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는 VSCode를 켠 횟수도 손에 꼽는다. 기술 블로그나 아티클을 읽는 빈도 역시 현저히 줄었다.
“지금 이걸 읽어서 뭐 하나, 어차피 군대 가면 다 리셋될 텐데.”
이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회의감과 무기력감이 은근히 퍼졌고, 아티클 제목만 흘겨본 채로 끝내는 날이 많았다.
오늘 아침, 학교에서 친한 한국인 형들이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 입대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도 할 겸 어찌어찌 영상통화를 했다. 다들 머리 좀 보여달라며 장난을 쳤다. “모자는 절대 안 벗습니다~”라고 버텼지만, 분위기상 안 벗을 수가 없었다. 결국 수치심을 이겨내고 잠깐 벗었다. 이마가 넓다고 놀려대는 후배가 있었는데 복학하면 두고 보자고.
원래는 작년에 군대를 갔어야 했다. 이전 글들에서 잠깐 언급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1년을 미루게 된 핵심 이유 중 하나는 여자였다. 1학년 2학기 끝자락에 여자친구가 생겼고, 인턴십에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여러모로 시기가 잘 맞아 군대를 미루기로 했다. 그때 군대를 미루라고 조언해 줬던 96년생 학교 선배가 있다.
같은 전공이라 프로젝트도 자주 하고, 자취 요리 꿀팁들도 알려주시고, 게임도 자주 하고 가까운 형이다. 그 형과 마지막 인사를 하던 중 이 말을 하더라.
"맨날 군대 좀 빨리 가라라고 했는데 드디어 가네. 그러게 작년에 가지 그랬냐. 군대 미뤘다고 해서 테슬라 간 게 아니다. 작년에 갔다가 제대해도 어차피 테슬라든 더 좋은 회사든 갈 수 있었을 거다."
생각해본 적 없는 시각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군대를 미룬 건 테슬라 인턴십이라는 결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 일찍 갔든, 늦게 갔든 내 실력과 열정이 어디가진 않을꺼니까.
if가 있다면, else도 있다.
“만약 내가 군대를 갔더라면.”
그 문장의 괄호 속, else-statement 안의 코드들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온 세계선의 내가, 군대를 미룬 지금의 나보다 더 단단할지도 모른다.
아직 작성되지 않은 코드라인을 실행하면 컴파일 에러가 난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그저 주석을 달며 기다리는 중일뿐이다. 언젠가 이 조건문이 완성될 때, 어떤 값이 반환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 자체를 즐기며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