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크루팅, 테슬라, 그리고 입대
Java라는 프로그래밍 언어에는 Garbage Collection이라는 특별한 기능이 있다. 코드는 실행 버튼 하나를 띡 누른다고 해서 마법처럼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삼시 세 끼를 챙겨 먹어야 힘이 나듯, 프로그램도 그에 맞는 하드웨어(CPU, 메모리와 같은)가 필요하다. 특히 메모리는 저장 공간이다.
필자는 지금 군 복무 중이기 때문에 군대 비유를 하나 들겠다. 논산 훈련소에선 사회에선 통용되지 않는 군대만의 특별한 규칙들, 제식, 총기를 다루는 법을 5주라는 짧은 (어찌 보면 긴) 시간 동안 훈련병의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누군가는 밀려들어오는 지식과 명령의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낼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개개인이 한 번에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Java로 작성된 프로그램에게 할당된 메모리에도 저장 가능한 최대치가 있다. 그래서 메모리를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Garbage Collection은 주기적으로 메모리에서 오래되어 방치된, 더 이상 참조되지 않는 데이터들을 제거하는 프로세스다. Java 개발자들은 메모리 관리는 제쳐두고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는 셈이다.
회고 자체가 처음이다. 누군가는 기억력이 나쁘다고 하겠지만, 내게는 상처가 되는 경험들을 빠르게 지워버리는 뛰어난 'Garbage Collection'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는 회복탄력성이 뛰어나다. 반대로 그만큼 복습을 회피하고, 같은 실수를 종종 반복하는 부작용이 있다.
군대에선 하루 일과가 끝나거나 주말이 되면 개인 정비 시간이 부여된다. 휴대폰도 불출받고, 사이버지식공유방에서도(일명 싸지방)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으니 쉽게 시간이 붕 뜨곤 한다. 사회에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았을 2025년에 대한 회고를 시작한다.
전반전은 한국에서, 후반전은 미국에서 펼쳐졌다. 중학교 3학년 때 혼자 미국 유학을 시작했다. 방학이 되기만 하면 한국에 돌아갔고, 특히 짧은 겨울 방학은 한국의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나느라 늘 바빴다.
하지만 2025년 1월은 조금 달랐다. 아빠가 새로 사준 와이드 모니터 앞에서 맥북을 켜고 이력서를 고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25년 여름 인턴 구직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판단했던 시기다. 이미 많은 불합격 메일을 받은 뒤였고, 아침마다 메일함을 열어보는 게 습관처럼 굳어가던 때였다.
이력서를 크게 뒤집었다. 나와 같은 국제학생으로 커리어를 쌓아 지금은 애플에서 일하는 선배의 도움을 받았다. 내용은 같지만 조금 더 멋들어지고, 자신감 넘쳐 보이는 이력서가 됐다. 색을 넣고, 동사를 바꾸고, 불필요한 문장을 덜어냈다. 그렇게 새 공고들을 다시 지원했다. 이때까지 제출한 이력서는 대략 300곳쯤 됐을 것이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와서도 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집이 아닌 도서관으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
새 이력서를 얻고 나서는 지원 전략을 바꿨다. 내가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기술 스택을 정확히 요구하는 공고만 골랐다. 서류에서 떨어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되는, 조금은 오만한 선택이었다. 선택 사항이던 Cover Letter도 (편지 형식의 짤막한 자기소개서) 한 줄 한 줄 공을 들여 작성했다. 그렇게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도서관에서 과제, 사이드 프로젝트, 인턴 지원을 3분할 루틴을 반복했다.
2월 중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가 찾아왔다.
아주 뜬금없이 테슬라의 리크루터로부터 이메일이 하나 와있었다. 잠금화면에 올라온 흔한 이메일 알림인 줄 알고 옆으로 스와이프 해둔 이메일이 알고 보니 테슬라였다. 인터뷰 제안은 아니었고, 어울릴 것 같은 팀이 있는데 이력서를 전달해도 되겠냐는 연락이었다. 기본 정보와 비자 문제, 가장 자랑스러운 프로젝트를 적는 설문지를 제출해야 했다. 아마 22년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작성한 설문이었을 것이다.
3월은 격변이었다. 테슬라와 1차, 최종 인터뷰를 마쳤다. 결과를 기다리던 2주는 유난히 느리게 흘렀다.
결과를 듣지 못한 채 뉴욕으로 향했다. 가장 친한 대학교 선배와 함께 뉴욕에서 자취하는 졸업생 형의 자취방에 쳐들어갔다. 월스트리트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뉴욕 2일 차엔 근처 뉴저지의 내 모교에 찾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 방문이었다. 더 늦어지면 알고 지낸 선생님들이 학교를 떠나거나 친한 후배들이 졸업할 테니까. 학교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동그랗게 둘러싼 숲 한가운데에 중세 귀족의 저택처럼 생긴 익숙한 학교 건물이 보였다. 학교생활 내내 나를 지도해 주신 컴퓨터 과학 선생님과 오랜 대화를 나누었고, 익숙한 얼굴의 선생님들, 같은 동아리 후배들과 인사를 나눴다. 저녁은 학교 근처의 대학 다운타운에서 해결했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 먹고 싶은 날이면 시켜 먹던 사천식 칠리 오일 생선 요리를 사 먹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자극적인 맛, 씁쓸하면서도 그리운 맛.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가끔 꿈에서 등장할 때마다 행복한 기억이 남는 그곳.
뉴욕의 남은 일정은 형들과 함께 했다. 한국식 고급 고깃집인 Cote을 어찌어찌 예약했다. 웃기게도 저녁 10시 밖에 예약 가능한 시간이 없어서 저녁을 굶고 밤늦게 고기를 구워 먹었다. 직장인 형이 수십만 원짜리 식사 한 번 크게 쐈다. 나도 꼭 성공해서 저런 거 해봐야지.
이 무렵 오랜만에 관심이 가는 이성이 생겼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 이성과 몇 가지 접점들이 (썸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애매한...?) 있었으나, 결과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연애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내려놓은 지 여섯 달이 넘어가는 시점이다. 하지만 호르몬의 분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슬금슬금 연애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연락하던 이성이 있었다. 테슬라 최종 합격 결과와 관계에 대한 결과를 동시에 기다리고 있던 인내의 3월이었다.
4월의 가장 큰 키워드는 테슬라가 아니라 '성장'이다.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 뉴욕 여행에서 돌아온 뒤 테슬라 최종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봄비를 맞으며 시계탑 앞에서 울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메일을 확인하자마자 도서관을 뛰쳐나왔다.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놀랍게도 이 감정은 몇 시간 만에 사라졌다. 머릿속엔 ‘괜찮다’, ‘재밌는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2학년이고, 기회는 남아 있었다. 미친 소리일 수 있지만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해서 오히려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종 보스를 여러 번 죽고 나서 깨는 게임이 더 짜릿하지 않은가.
그렇게 곧장 다시 일어난 나는 남은 힘들을 하나둘씩 모아 한국 인턴을 지원하고 있었다.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모두 새로운 기회로 보였다. 내면이 단단해진 '나'가 그 자리에 있었다. 불과 일 년 전의 핫바지였다면 불합격 결과에 엉엉 울다가 술 마시면서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인턴을 하면서도 집에 와선 궁시렁궁시렁 아빠에게 푸념을 풀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다.
그렇게 단단해진 나를 알아본 듯, 인턴 티오 자리가 추가로 생겨 테슬라 추가 합격을 했다. 이 얘기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서술했으니 넘어가겠다.
여담으로 3월에 관심이 있던 여자애와는 잘 되지 않았다. 군대 문제도 있고 내가 망설이고 간을 본 탓에 잘 안된 관계로 회고한다. 4월엔 소개도 받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는 거더라...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고, 안정된' 여름이었다. 몹시 여유롭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의 프리몬트라는 지역에서 출퇴근을 했다. 프리몬트는 시골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주택가였다. 실리콘밸리에서도 굉장히 안전한 지역으로 유명해 가족 단위로 많이 사는 동네다. 정말 집 밖에 없더라. 그나마 집 앞의 공원에 가끔 걸어가서 책을 읽거나 호수를 보며 멍을 때리곤 했다.
테슬라에서의 일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출퇴근하는 길엔 버스 안에서 잠을 자거나 창 밖 풍경을 감상하는 여유가 있었다. 업무는 마치 재미있는 게임을 하며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셈이었다. 항상 상상만 하던 미국 빅테크에서의 업무 방식을 몸으로 느끼며 얼마나 내 상상이 들어맞고, 무엇이 다른지. 굳이 내가 물어보거나 말을 하지 않아도 척척 모든 것을 알고 처리해 주는 유능한 팀원들. 처음으로 진심으로 존경하고 싶은 멘토이자 매니저였던 케빈. 13주라는 짧고도 긴 시간 동안의 인턴십은 내게 너무나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초등학교 때 나를 코딩 학원에 밀어 넣었던 엄마에게 정말로 감사하게 된 나날들이었다.
퇴근하고 나서는 보통 혼자 시간을 보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꽤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넘치는 여유를 즐겼다. 아침엔 컵밥을 먹고, 저녁엔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었다. 바다가 바로 옆인 캘리포니아 초밥은 배달 주제에 내가 여태껏 먹어본 초밥 top 5에 든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문학에 종사하고 있는 엄마의 영향을 받아 한국 소설책을 읽었다. 여름 동안 다섯 권을 읽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문목하 작가의「돌이킬 수 있는」이다. SF 소설인데 싱크홀, 능력, 연민 등의 흥미로운 설정들이 난무한다.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삼시 세 끼를 잘 챙겨 먹으며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퇴근하고는 회사 헬스장에서 친한 한국인 인턴 형과 헬스를 꾸준히 했다. 스트레스도 하나도 안 받으니 근육과 살이 매우 잘 붙었다. 프로틴 파우더나 크레아틴 같은 보충제도 먹지 않았는데 인생 최전성기 몸이었다.
인턴이 끝난 뒤엔 구글 오피스 투어도 해보고, 뉴욕에서 지드래곤 콘서트도 봤다. 끝내 학교로 돌아와 사람들과 술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고 미국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추억들을 남겼다.
한국에 돌아왔다. 자주 보지 못했던 한국에서의 인연들과의 약속들로 가득 찬 한 달이었다. 연락하고 지낸 당근의 개발자분과 만나 테슬라에서의 경험을 나누기도 했고, 군대에 먼저 간 대학 동기들의 휴가를 뺏어 같이 부산 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래도 무엇보다 가족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친가에 내려갔다. 많이 쇠약해지신 친할아버지가 집 밖에 안아계셨다. 어렸을 때 같이 낚시를 하러 가기도 하고 물수제비를 했었다. 대부분을 도시에서 보낸 내 유년 시절에 몇 안 되는 정겨운 시골 기억엔 항상 친할아버지가 있다. 할머니는 무릎이 안 좋으셔서 지난 몇 년 동안 직접 밥을 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9월엔 특별히 직접 밥을 차리셨는데 민물 새우찌개의 보법이 달랐다. 진짜 먹어본 적 없는 독보적인 감칠맛이 났다. 엄마도 맛있다고 엄지 척을 날렸다.
부모님과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다. 무슨 벙커를 개조해서 만든 미디어 아트 전시관도 갔다 오고 회도 많이 먹었다. 올레시장 앞에 있는 특이한 수제 맥주 바에서 아빠와 둘이 술을 마시며 연애에 대해 얘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대학교에서 있었던 몇 가지 이성과의 사건들을 나열했었는데 여자는 다양하게 만나보라는 아빠의 새침한 조언이 마음에 들었다.
호주에서 공부하고 있는 누나가 한국에 들어왔다. 네 가족이 오랜만에 모였다. 이때다 싶어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미슐랭 2스타 '알라 프리마'를 예약했다. '은어와 멜론'은 아직도 생생히 그 맛이 기억난다. 빼빼 마른 생선 뼈가 그대로 올라간 충격적인 비주얼에, 멜론과 구운 생선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조합.
백만 원을 훌쩍 넘어가는 금액이었지만 흔퀘히 결제했다. 내 인생 처음으로 거금을 결제했지만 아깝다기보단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느꼈다. 종업원에게 카드를 건넸을 때 괜히 어깨가 올라간 기분이 들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고개를 내미기 시작할 즈음, 내 마음도 급격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입대가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마땅히 만날 만한 한국의 지인들도 하나둘 떨어져 나간 시기라,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에서 보냈다. 가끔 아빠와 카페에 가거나 러닝머신 위를 걷는 시간을 빼고는 말이다.
분위기 환기 겸 엄마와 외할머니와 첫 도쿄 여행을 다녀왔다. 좋아하는 초밥도 많이 먹고, 혼자 사케 바에 가서 사장님과 사진을 찍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더 나이 드시기 전에 꼭 같이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운 것 같아 뿌듯했다.
충분히 단단해졌다고 믿었던 내면도, 사실은 아직 연약했던 모양이다. 군 입대가 현실로 다가오자 오만가지 생각들이 뒤엉켜 떠올랐다. 2년의 공백 동안 미국에서 함께 경쟁하던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건 아닐지, 더 큰 프로젝트나 또 다른 인턴에 도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통째로 놓치게 되는 건 아닐지. 그런 걱정들이 무기력함과 허무감으로 번져 있던 시기였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밀어내고 싶어 눈을 뜨면 습관처럼 컴퓨터를 켰고, 롤토체스를 입대 전날까지 반복했다.
10월 마지막 주의 월요일, 논산 훈련소에 입교했다. 시원해진 머리를 매만지며 묘한 감정이 스쳤다. 아, 진짜 가는구나.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그날 작은 깜짝 이벤트가 있었다. 먼저 입대한 대학 친구 하나가 부모님과 몰래 짜고 입소식에 따라온 것이다. 집 앞을 떠나는 차 안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열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추위에 꽁꽁 사멘 그 친구였다. 덕분에 입소식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덜 지루했고, 긴장도 한결 풀렸다. 휴가까지 써서 달려온 친구가 고마웠고, 그래도 헛되이 살아온 건 아니었나 보다 싶었다.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최악의 한 달이었다.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전환되는 시점. 22년 동안 몸에 밴 관습과 생각들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럴 필요도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부적응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밥을 먹으러 갈 때마다 제식을 맞춰 걷고, 굳이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명령에 복종하는 구조 자체가 불만이었다. 유학 생활 내내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맹목적인 순종을 피하고,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태도였다. 군대는 그런 배움들과 정반대의 가치를 요구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값비싼 시간과 비용을 들여 체득한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효화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붙잡고 있던 기준들이 여기서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처럼 느껴졌다.
마음만 힘든 게 아니었다. 신체적으로도 버거웠다. 총은 지나치게 무거웠고, 등에 멘 군장은 아틀라스가 메고 있는 천구를 연상시켰다. 매일같이 불만과 피로가 쌓였고, 오랜만에 고도의 스트레스가 몰아닥친 한 달이었다.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훈련소를 수료하고 정보통신학교에 입교했다. 주말이면 하루 종일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 시간은 생각보다 넉넉했다. 간부들이 출근하지 않는 주말엔 나를 재촉하거나 간섭하는 사람도 없었다. PX에서 산 줄 노트 하나를 펼쳐두고, 오랜만에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군대에서, 나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까.
내가 군인이 되었음을 인정했다.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처음으로 인정했다. 인정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다음 장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쌓아온 지식들이 흐려질 수도 있고, 개발 감각이 무뎌질 수도 있다. 인턴이나 경진대회 같은 중요한 기회들을 놓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실들에 매달려 좌절하기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기로 했다.
그동안 인턴 준비와 학교 과제, 시험, 잦은 술자리와 여행들에 밀려 미뤄두었던 공부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갔던 개념들.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내가 정말로 IT 산업 안에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만약 복학 후에도 계속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는 커리어를 선택하게 된다면, 나는 결과보다는 성장 속도의 ‘기울기’에 집중하려 한다. 쉽게 말하면, 내 실력의 ‘복구 속도’가 누구보다 빠르다면 군대에서의 시간은 공백이 아니라 준비가 된다. 시간을 버린 게 아니라, 시간을 갈고닦은 셈이다.
어쩌면 이 시간은, 무협지에 나오는 폐관수련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군대에서 브런치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다 방법이 있더라. 개인 정비 시간을 잘만 활용하면 이곳에서도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들을 이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라는 환경이 모든 걸 멈추게 하진 않는다. 부족하다고 느꼈던 클라우드, 보안, 양자컴퓨팅, 운영체제 같은 분야의 지식들을 차분히 채워가고 있고, 예전처럼 웹이나 앱 개발 프로젝트를 이어갈 수 있는 환경도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다.
미뤄두었던 소설책들도 꽤 읽고 있다. 요즘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외계인 경민과 지구인 한아의 기묘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지구에서 한아뿐」이다. 로맨스에 SF를 한 스푼 얹은 맛이다. 틈이 나면 자기 계발서나 역사책도 함께 읽어볼 생각이다. 코딩만 하다 보니 어느새 각진 모양이 되어버린 뇌를, 다시 말랑말랑하게 풀어줄 필요가 있다. 교양을 쌓고 감정을 채우는 일 역시 지금의 나에게는 중요한 목표다.
여기서는 속도가 느려졌다. 대신, 필요 없는 것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 급하다는 생각, 뒤처진다는 불안, 쓸데없이 힘을 주던 마음들 같은 것들. 그 자리에 무엇을 남길지는 이제 내가 고를 수 있게 됐다.
군대에서도 멈추지 않는 내가 되었으면 한다.
이대로 꾸준히, 나를 갈고닦을 수 있는 의미 있는 1년 6개월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