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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많던 그때로

132일 차

by 다작이

아침에 기차를 기다리다 한컷 남겼다. 문득 끝없이 곧게 뻗은 선로를 따라 올라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선로에 뛰어들면 범칙금이 1,000만 원이라는 표지판을 본 기억이 났다. 범칙금도 범칙금이지만, 이제는 그러다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누군가가 그렇게 하라고 떠다밀어도 막상 그렇게 할 수 없을 터였다.


선로 끝에 부옇게 안개 낀 듯한, 막 어둠을 벗어나 밝은 빛이 닿는 곳에 도달한 듯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기차가 들어오기 전 저 지점을 본 순간 아주 오래전 생각이 났다. 맞다. 아주 오래전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어머니 말씀을 빌자면 아마도 그때가 대여섯 살 정도였던 걸로 알고 있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1970년대 후반은 막 가난의 티를 벗어던질락 말락 하던 시기였다. 당연히 우리 집도 형편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경제적인 여건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이 사는 곳엔 항상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골목이, 그것도 겨우 두어 사람 마주 보고 지나갈 수 있을 듯 말 듯한 골목이 많았고, 집으로 가기까지 계단이 많았으며, 또 더러는 언덕을 끼고 있는 집이 많았다. 그때 그 집은 언덕을 끼고 있었는데, 그 어릴 때에 동네 친구들과 밖에 나가 놀 때면 어머니가 늘 신신당부하던 말이 있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언덕 너머로는 가지 마라.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이 그러하듯 다른 아이들도 똑같은 얘기를 들으며 낮동안 신나게 놀았고, 기껏 해봤자 언덕 위에 올라 뭔가를 타고 내려오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 중에 한 명이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야, 우리 저 언덕 너머로 가보자. 저기를 넘어가면 꼭 뭔가가 있을 것 같지 않아?"

유독 호기심이 많은 계집아이, 무엇이든 지기 싫어하는 아이, 남자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뒤엉켜 놀던 아이였다. 구슬 따먹기를 하다 된통 잃으면 분한 마음에 밤에 잠 못 이루던 그런 아이였다.

그 아이의 말은 내게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나 역시 언젠가는 저 언덕 너머로 가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와 나는 일단 가지고 놀던 세 발 자전거를 집 대문 안에 들여놓고 밖에서 다시 만났다. 둘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그 가파른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그 어린 나이에, 그 짧은 다리로 막상 걸어 올라가기엔 무척 버거웠지만, 우리 둘은 진짜 그런 생각을 했다. 언덕을 넘어가면 분명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그 아이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마치 그때의 마음은 무지개를 보고 그 끝에 꼭 닿고 싶어 마냥 무지개를 따라 걷는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다리도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때의 나와 그 아이에게는 뭔가 새로운 세상을 볼 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고, 걷다 보면 그 꿈을 이룰 거라는 희망이 있었으며, 그 세상을 만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무척 설렜었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점심 먹자마자 걷기 시작한 것이 해가 질 때까지 걸었던 기억이 났다. 사실 우리가 걸었던 길은 꽤나 단순한 길이었다. 언덕을 올라가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줄곧 걸으면 되는 길이 아니었나 싶다. 어두워져 겁이 나면 둘이 손을 꼭 잡고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가기만 하면 되는 길이었다. 다리도 아프고, 아마도 어쩌면 겁을 집어먹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야! 우리 이러다 다리 부러지는 거 아냐?"

내가 힌트를 줬는지 아니면 그 여자아이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느새 집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울먹울먹 하며 걷던 그때 다시 우리 동네가 있는 언덕 위까지 왔다. 물론 그날 동네는, 아이 둘이 없어졌다고 발칵 뒤집혔다. 그 아이와 나는 울면서 언덕을 걸어 내려갔고,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집에 돌아가서 실컷 두들겨 맞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작은 머리에서, 가슴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이 생겨났을까? 그런 희망과 꿈과 설렘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이 오늘 아침 따라 무척 그리워졌다. 과연 그것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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