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애써서
유난 스런 계절, 시끄러운 마음에
지인 춘승과 오랜만에 술을 한잔 했습니다.
이분은 뭐랄까요.
비우고 내려놓고 대화하기가 참 편한 사람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시선 가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그저 오롯이 대화를 즐긴다고 할까요.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흔하디 흔한, 대낮의 수작(酬酌)을 예로 들겠습니다.
나 : 생각해 보면 딱히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는 일도 없었던 것 같아요. 시킨 일과 할 일만 있었달까. 그래도 뭐, 할 줄 아는 거 없이도 회사에서 벌려 놓은 일 수습하고 할 일 다 한 거 보면 나름 다행이다 생각도 들고.
춘승 : 난 신기한 게 열심히 한 기억이 없어. 그냥 한 것 같아. 그저 해놓은 일에 부끄럽긴 싫고 나 창피하기 싫어서 애쓴 정도. 그 정도는 될라나요.
나 : 나름 애쓴 거예요. 단지 '어차피'에 몰입한 거야. 해야 하니까 한 거지. 애쓰지 않고 되는 일 있겠어요.
춘성 : 그러게요. 하면 또 되는 게 일이라. 우리 저기 같이 있을 때 '고연봉 잡부' 소리도 들었잖아요.
나 : 그때 대표 놈이 사명감 얘기하길래 둘이 한참 웃었다. 대표 놈 차 바꿔주고 집평수 늘려주는 일에 뭔 얼어 죽을 사명감. 광고주 만났을 때 낯없는 일 만들기 싫어서 딱 그만큼만 애쓴 거지.
춘승 : 그래도 같이 일할 때 재미있었던 것 같아.
나 : 재미마저 없었으면 못했죠. 그래도 난 요즘 콩나물 다듬는 게 재밌어요.
춘승 : 콩나물이 왜? 부업해요? 돈 되면 같이해.
나 : 다듬다 보면 모르겠지만 당장 돈 벌자고 하는 건 아니고.
춘승 : 돈도 안 되는 걸 뭐 하려 해. 진짜 뭔데요. 아니 왜? 그렇게 없어?
나 : 아니 왜, 있잖아요.「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윤여정 선생님하고 강말금 배우하고 그 콩나물 장면.
춘승 : 사람이 참, 이렇게 티를 낸다 티를. 좋겠네, 하고 싶은 글 쓰고 살아서.
나 : 남이 들으면 욕할지 모르겠는데 살려고 쓰는 게 아니라서 편하게 쓰나 봐요. 그래도 애는 써요.
춘승 : 아니야. 그게 맞아. 사는 중에 쓰는 거지. 뭐 쓸려고 살아? 쓰고 쓰다 보면... 뭐..., 어쨌든 난 그 장면이 좋던데. 윤여정 선생님 시 써오라는 숙제받고 시 쓰는 장면. 돌아와 좋은 사람도 없는데 이상하게 좋아.
나 : 갱년기야. 술 말고 화애락을 먹어봐요.
춘승 : 오랜만에 다시 함 봐야겠다. 이것도 막 갖다 쓰겠네? 아무거나 막 쓰지 말고 애를 쓰란 말이에요.
할머니의 詩
.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info.
영화_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20년
좋아하는 문장_ "본래 별게 아닌 게 제일 소중한 거예요."
나만의 킬포_ "장국영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 그리고 이희문"
epil.
지금 하고 싶은 일을 나름 애쓰면서 하고 있는 복된 지금.
아무렇게나 쓰라곤 안 그랬다는 말에 살짝 움츠리는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