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쨌든 써야 읽게 되는 지어 낸 이야기

또는 지어낸 이야기

by 글짓는 날때

햇살 좋은 휴일에 오랜만에 춘승과 낮술을 했습니다.

스티븐 킹에게 태비사가 있었듯이 (뭐, 그 정도는 아니어도) 언제나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몇 안 되는 든든한 조력자이죠.


맥주의 시원함과 풋콩 껍질의 짭짜름함에 기분이 좋아질 찰나,

훅,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이라 치고, 각색은 있을 거잖아요?"


[오롯이 저의 시점이기에 완곡, 또는 왜곡된 표현도 있겠지만 짧은 대화를 옮겨 봅니다]


"각색 까지는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할까.

일단 그 당시 내가 느낀 감정은 사실이고, 내 시점에서 그 사실을 인지했잖아요. 그러면 인지된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지어요. 이걸 지어낸 이야기라 하면 지어낸 이야기가 맞고, 또 내가 지은 이야기도 맞고"


"그러니까, 지어낸 이야긴 거잖아요. 당신 시점에선 사실이어도 읽는 사람 관점에선 '설마?'가 생길 수도 있는 거고. 어떤 측면에선 의심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 말은 읽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지 않냐는 거예요"


"무슨 햇병아리한테 날고 있는 새의 고민을 물어봐요. 자기 말처럼 관점에 따라선 공감도 있고 반발도 있겠죠. 어떤 측면에선 의심도 할 거고. 그런데 일단 어떤 이야기든 쓰여야만 읽고 읽은 사람의 관점으로 판단을 하는 거잖아요. 아마 쓰여진 모든 이야기가 다 그렇지 않을까? 물론 신경이야 당연히 쓰죠. 고민도 하고. 근데 이야기를 생각하고 쓰는 모든 순간이 심사와 평가는 아니잖아요. 누가 생각하고 어떻게 쓰겠어"


"음, 좋아, 오케이. 그럼, 아예 소설 같은 걸 써보는 건 어떨까?"


"아니, 나도 쓰고 싶지 소설, 되겠어요? 아니, 난 그것보다 지금 막 생각난 건데요, 내가 지은 글에 나오는 자기의(춘승)의 존재는 과연 믿을까 하는 생각부터 드는데요. 오! 뭐야. 키리시마야? 진짜 춘승으로 이야기 한번 써볼까요?"


"그러니까. 내가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내가 맞는데 읽으면 나 같지가 않아서 그래. 고민 좀 해봐요"


"아! 혹시 영화 '아무도 없는 곳' 봤어요?

보면 4명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리고 4명의 이야기를 듣는 '창석'이라는 인물이 있어. 근데 이 창석은 4명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의심도 신뢰도 공감도 아닌 모호한 안타까움만 보이거든요"


"알아요. 본거야. 모든 이야기가 창석 본인 얘기잖아요. 창석과 창석 주변의 이야기를 창석 주변의 시선과 관점으로 쓰여진 이야기? 난 그렇게 봤어요, 그 영화"



영화 '아무도 없는 곳' 창석과 미영의 대화 中


영화 '아무도 없는 곳' 창석과 유진의 대화 中


영화 '아무도 없는 곳' 창석과 성하의 대화 中


영화 '아무도 없는 곳' 창석과 주은의 대화 中



"딱, 그거 같아요. 지어낸 이야기도 관점에 따라 솔직한 고백이 되고 신기한 이야기도 털어내면 추모가 되고 그래서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결국 믿게 되어 위로가 되는 그런 이야기. 아무도 없지만 이야기가 있어 위로가 되는. 그렇게 쓰여 가치가 있는 그런 이야기 한번 지어 보고 싶은 거죠"


"아니, 붕어빵이면 된다며"


"그땐 그렇고, 지금은 또 다르니까. 맥주 마시잖아요. 몇 잔 째야..."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누가 읽고 믿겠냐고"




info.

영화_ 「아무도 없는 곳」 2020년

좋아하는 문장_"제가 방금 지어낸 이야기니까요"

기억나는 문장_"저도 뭔가 쓰는 걸 좋아하거든요"


epil.

만약 글을 짓는다면 아마 저보다 훨씬 잘 지을 양반입니다.

중간중간 욕도 많이 먹었지만 맥주 마시며 글을 갈무리하는 것도

꽤 재밌습니다.


tmi.

'키리시마'는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데'의

스토리상 주요 배역이긴 하나,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정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감싸서 드러내는 깊은 속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