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편집하고 대화로 함께 만드는 디자인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직업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건축 설계 쪽 일을 해요." 여기까지는 괜찮다.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이다. 그런데 이어서 니트 패턴 디자인 얘기를 꺼내는 순간,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뀐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어김없이 돌아오는 질문. "그러면 본업이 뭐예요?"
그 질문이 불편하지는 않다. 이상한 질문이 아니니까.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이 뜨개 패턴을 만든다는 건, 객관적으로 봐도 설명이 필요한 조합이다. 다만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본업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은, 사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르냐고 묻고 있는 거라는 것. 나는 반대 방향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왜 다른 일이지?
관계를 편집하는 일
건축에서 나는 벽을 어디에 세우고, 창문을 어디에 뚫고, 복도를 얼마나 좁게 만들지를 결정한다. 그 결정들이 실제로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벽 자체가 아니라, 벽이 만들어내는 '이쪽'과 '저쪽'이다. 창문이 아니라, 창문을 통해 생겨나는 안과 밖의 시선이다. 건축은 사물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관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뜨개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격자 위에 코의 배치를 결정한다. 어떤 코를 겹치고, 어떤 무늬를 반복하고, 얼마나 촘촘하게 엮을지를 정한다. 그 결정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실이 아니라, 실과 실 사이의 밀도와 거리다.
결국 같은 질문이다. 이 요소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게 할 것인가.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든 가는 실 한 가닥이든, 그것들이 사람과 맺는 '사이(間)'를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디자인의 핵심이다.
대화가 없으면 디자인도 없다
혼자 하는 사유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벽을 어디에 세울지 결정할 때, 파트너 최재원의 시선이 끼어든다. 뜨개 패턴을 완성할 때, 실제로 뜨개질을 하는 수민이 불쑥 한 마디를 던진다. "이 무늬, 이 실로 뜨면 안어울려." 그 한 마디가 며칠 동안 세운 논리를 바꿔놓기도 한다. 처음엔 거슬렸다. 지금은 그 한 마디가 없으면 오히려 불안하다.
서로의 취향이 같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더 멀리 갈 수 있다. 다른 시선이 내 논리의 빈틈을 찾아내고, 그 빈틈을 메우는 과정에서 처음엔 없던 무언가가 생겨난다. 합의가 아니라 충돌. 절충이 아니라 보완. 대화는 그렇게 디자인을 특별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프랑스의 시간과 한국의 에너지
프랑스에서 일하다 보면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 한국과 다르다는 걸 느낀다. 파리의 건물들은 수백 년을 버텨온 석조 입면으로 거리를 이루고 있다. 그 축적된 시간 앞에서 새 건물을 제안한다는 건, 그 시간과 대화를 시작한다는 의미다. 서두르면 나만 손해다.
서울은 다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어제의 정답이 오늘은 틀리기도 한다. 느린 도시에서는 오래 버티는 것을 배우고, 빠른 도시에서는 빠르게 반응하는 것을 배운다. 두 도시 사이에서 나는 공간이 사람과 맺는 관계가 맥락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매일 확인한다. 혼란스럽지만, 그게 지금 내가 가진 가장 쓸모 있는 경험이다.
기록은 사유의 도구다
이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정보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매일 하는 일이 실제로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를 문장으로 정리해보려는 것이다. 쓰다 보면 몰랐던 걸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위해 쓴다.
건축에서도, 뜨개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