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숏츠

코리안 나르시시스트

죄와 벌

by 임경주


내가 죽인 사람은 총 일곱이다.

미란다의 원칙에 따라, 나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고 국내 서열 최고라는 법률법인의 대표변호인단 13인을 변호인으로 고용한 상태다. 13인 중 7인은 검사장과 법무부차관을 비롯한 판검사 출신으로 전관예우를 받고 있으며 나머지 6인의 변호인은 국내 업계 서열 1위에서 6위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이 내 입을 대신한다.

난 레벨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한데, 같은 사람끼리는 레벨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난 재판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레벨, 즉 서열을 나누는 건 내가 타는 슈퍼카와 즐겨 찾는 미쉐린 5성급 레스토랑 그리고 에르메스와 샤넬 루이비통이 자릿세 없이 입점하는 백화점, 거기에 나처럼 상위 0.1프로만 모시는 피부관리숍과 같은 것이지 사람은 서열이 없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열을 꼭 나누어 구분해야겠다면, 사람만 빼라고 한다. 사람을 빼고 얼마든지 그 서열을 나누어도 좋다고 한다.

누가? 나보다 못한 것들이.

왜? 감히 나를 가르치려고.

불쾌한 건 둘째고 난 도무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모두가 다 내 발아래였다.

공부부터 시작해 운동도 내가 최고였고 심지어 외모도 그 누구 하나 나를 따라오는 자가 없었다. 선생들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때문이겠지만, 나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다 보인다. 모두가 서열 아래였고 위는 없었다.


내 하루일과는 샤워로 시작되는데 피부노화를 막기 위해서는 물의 온도가 생명이다. 샤워 루틴을 좀 공개해 볼까? 물 온도는 정확히 37.5도를 유지한다. 상위 0.1프로만 다닐 수 있는 피부과에서 추천받은 온도다.


세안은 반드시 3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미온수로 각질을 불리는 단계. 두 번째는 거품이 풍성한 클렌저로 모공 속 피지를 제거하는 단계. 마지막은 냉수로 모공을 조이는 단계다. 이 모든 과정은 정확히 12분 30초가 소요된다. 1초라도 어긋나면 하루가 틀어진다. 나는 그런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한다.


세안제는 프랑스에서 직구한 1개당 30만 원짜리 명품이고 세안 후엔 7단계 스킨케어 과정을 거친다.

내 얼굴은 자산이다. 이마의 윤광은 나의 신용등급이다.

그 얼굴 속에 나는 애초에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 얼굴이 나다. 누구를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는데 이 얼굴 어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반하지 않는 여자가 없다. 감탄을 한다. 궁금한 것도 많다. 오는 여자 막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내버릴 때 매달리는 것들은, 그때부터 개와 돼지로 보인다. 여자들은 내가 구분하고 나누는 서열의 기준에 끼지도 못하니 그저 친절의 대상이다. 나를 더 돋보이게 해 준다.


아침은 오트밀과 블루베리, 점심은 5성 청담동 프렌치 레스토랑 저녁은 단백질 위주의 식단으로 통일된다. 내 몸은 브랜드다. 지방은 죄악이다. 난 내 몸이 너무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PT는 주 5회, 필라테스는 주 2회로 나누어 관리한다. 동작은 나를 따라올 자가 없다. 내 몸의 선은 곧 나의 위계다. 벼슬이다.


내가 죽인 것들은 이 레벨에 끼지도 못하는 남자들이다. 남자라는 것들이 어린 계집아이 머리카락 한올만큼도 못하게 나약하고, 왜 스스로를 방치하고 노력하지 않으며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걸까? 이들은 병균이다. 난 이 병균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호흡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용납할 수가 없다. 이것은 사회를 위한 청소다. 이 사회는 나를 필요로 한다.


감히 나를 가르치려고 드는 재판장은 내 변호인단 중 누구보다도 못한 사람이다. 이건 싸움도 아니지만 내가 이긴다. 이 나라는 결국 돈과 서열로 움직이니까.


거울 속 나를 바라본다. 완벽하다. 이마의 윤광, 턱선의 각도, 눈썹의 대칭. 이 얼굴은 나의 무기이자 방패다. 세상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그들이 나를 대할 때의 눈빛을 안다. 경외, 질투, 혹은 열등감. 그 모든 감정은 나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감히 누가 나를 벌한다는 걸까?


첫 번째 살인은 우리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근본도 없는 놈인데, 모두가 굽신거리고 우러러보는데 이 놈은 대가리에 뭐가 들었나 나를 무시했다. 그 눈빛과 태도를 보면 안다. 그 눈빛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태도는 날 가르치고 싶어 했다. 그건 용서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더 기분 나쁜 건, 아버지의 얼굴을 나보다 더 닮았다. 그래서 죽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마지막 살인은 사실 내 몸매의 롤모델이다. 신이 내린 자였다. 그토록 눈부신 몸매는 나보다 높은 서열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피트니스 강사다. 한데, 이제는 내가 분명 그를 넘어섰는데도 여전히 나를 가르치려고 들어서 서열정리를 위해 목 졸라 죽였다. 아마 그때 나는 다른 때와는 달리 지금의 이 피곤한 상황을 염두했던 것 같다.


검사가 구형을 한다. 징역 20년? 웃기고 자빠졌다.

역시나 검사의 구형은 재판장의 선고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재판장이 증거가 부족하다나 어쩐다나 무죄를 선고한다.

한데. 저 냄새나는 검사 놈이 나를 노려 보네?

재판부의 올바른 판결에 항소하겠단다.

그래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감히 나에게 덤비는 놈이 또 있네. 얼마든지 덤벼봐라. 나의 8번째 살인은 바로 네놈 곁에 있는, 네놈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될 테니까.


역겨운 것들아,

나는 신이다. 적어도 이 사회가 정한 룰 안에서는.




근데 말이지.

뭔가 벌을 받고 있는 기분이란, 외부적 처벌이 아닌, 완벽함에 대한 나의 강박, 끝없는 불안,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 속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부재와 외로움… 하지만 이 벌은 누구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나를 벌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벌은 나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내면의 벌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Fin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