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속 시간과 공간에 남겨진 감정의 잔향
감정의 존재성을 열어주는 예술 창작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이전에 다룬 것과 같이 때로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둘 수도 있고, 감정을 오히려 비워냄으로써 더욱 충만하게 표현할 수도 있다. 이번 글에서는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주목하고자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 감정의 존재성을 열어주는 예술가, 감정이 흘러간 공간을 통해 감정의 잔상을 느끼며 다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창작 방식을 가진 예술가이자, ‘나’를 여행하는 가수 권순관의 음악이다.
감정의 공간을 열고, 유유히 자신을 여행하는 가수 – 권순관
감정의 존재성이란, 감정을 해석이나 판단으로 가두지 않으며, 흐르고 남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다. 권순관은 이러한 감정의 존재성을 직접적인 설명으로 표현하기보다, 음악의 구조와 결에 조용히 담아내며 그만의 방식으로 감정을 다룬다. 그가 발매한 수많은 앨범 중 「Connected」의 수록곡〈이사〉는 무언가를 위해 의도된 감정이나 이별, 상실과 같은 하나로 정의된 감정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시간이 흐른 뒤, 감정이 머물렀던 공간을 조용히 회상하며 감정의 흔적들을 천천히 더듬고 떠올릴 수 있게 한다. 그 흔적 속에서 감정을 과장하거나 밀어붙이지 않고, 감정의 여운과 잔상 속에서 서서히 흘러가는 감정의 결을 따라간다.
텅 비워진 이 곳에서
많은 것이 쌓였네
나의 바램 나의 꿈들이
아직 베어있는 것 같아
- 〈이사〉 가사 中 -
그는 음악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감정을 해소하거나 정의하려 하지 않으며,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머물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준다. 그리고 감정이 스며있는 공간, 남긴 흔적을 되새기며, 그 공간의 감정을 억지로 정리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는 창작의 태도를 보인다. 이를 통해서 듣는 이들은 한 공간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그 모든 순간 속에서 느낀 복합적인 감정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권순관이 열어 낸 공간에서 ‘남’의 감정이 아닌 ‘나’의 감정을 느끼고 자신을 여행하게 된다. 그렇게 권순관은 그만의 방법으로 음악의 구조와 결에 감정의 공간과 함께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담아내고, 그 감정을 듣는 이들의 감정으로 전이시킨다.
그는 노래뿐만 아니라 연주를 통해서도 감정이 흘러가며 남긴 모든 공간과 순간의 감정을 재현한다. 잔잔한 피아노와 페달이 주는 잔향으로 감정이 그 공간에 남아있음을 표현하며 음악을 시작한다. 이후 점차 쌓여가는 현악기의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각각의 공간에 켜켜이 쌓여가는 감정과 그 순간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흘러 결국 다시 비워진 공간에서 감정을 회상하는 잔잔한 피아노의 독백으로 돌아온다. 이처럼 그는 곡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노래와 그 속에 담긴 이야기뿐만 아니라, 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악의 요소에서 섬세하게 감정을 다루고 표현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감정의 공간을 열어주는 가수 권순관은 오늘 소개한 곡 외의 다른 곡들에서 자신이 느낀 감정을 직접적으로 다루며 노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노래에서도 역시 감정을 의도적으로 이끌거나, 억지로 변형시키지 않고 자신이 느낀 감정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그 안에서 우리는 ‘남’의 감정이 아닌 ‘나’의 감정을 여행하고자 하는 그의 예술관과 그 속에 담긴 감정의 본질이 모두 같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감정의 본질이 담긴 그의 음악을 통해 우리는 음악에 담긴 하나의 사건을 듣는 것을 넘어서, 감정이 지나온 자리에 남아있는 모든 흔적을 발견하고, 그 순간의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사〉를 들으며 떠오르는 비워진 방, 그 안에 남은 향, 그리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각도와 그 모든 것에 담겨있는 ‘나’의 감정과 그 잔향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