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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호흡에 취해 추억 한 자락을 읊조리다

응원봉

24년 5월 둘째 주 토요일 새벽에 작은 일탈을 꿈꾸며 4시부터 잠을 설친다. 그전에도 지각 전과가 있어서 가급적 늦지 않으려고 자꾸만 시계를 들여 다 본다. 5시가 되자 일단 씻고 언제든지 나갈 준비를 한다. 혼자만 일상에서 일탈하는 미안함에 아내와 아들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까치발로 5:40에 집을 나선다.

지하철 게이트를 통과할 때 ‘1120’이라는 숫자가 생경하다. 지하철도 조조할인을 해준다. 건대역에 내려 서둘러 102번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6시 즈음이지만, 사람들의 호흡에서 내뿜는 매캐한 싸구려 소주 향이 나를 긴장시킨다. 알코올 내에 찌들어 있는 삼삼오오 대학생 무리가 내 눈에 확 들어온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웨스트에그 개츠비 대저택 파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를 아쉬워하는 커플들의 한숨과 겹친다.


6시 15분이 지나도록 102번 버스는 올 기미가 안 보인다. 카맵에서도 102번 버스는 4 정거장 전에서 계속 맴돌고 있다. 이번에도 지각이다. 만나기로 약속한 친구에게 양해 전화를 건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102번 버스는 6:25 즈음에 드디어 내 앞에 멈춰 선다.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타니 탑승 목적지로 쏜살같이 날라 간다.

이미 차에 와있던 친구 3명과 같이 ‘대전 계족산성’으로 향한다. 9:30 계족산성 주차장에는 부지런한 산림욕 애호가가 가득하다. 나는 아직까지 황톳길 맨발 산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일단 계족산성 정상을 향해 무작정 길을 걷는다.


산성 정상에 도달하여 모든 친구들과 다 같이 점핑을 한다. 분명 내가 제일 젊은데 배는 제일 많이 나와 있는 사진에 현타가 온다. 대학에 입학할 즈음에는 잘 몰랐지만, 가장 발랄했던 한때를 같은 공간에서 호흡해서 그런지, 30여 년이 지나서 만나도 자연스럽게 담소를 나눈다.

특히, 점핑하는 사진을 얼핏 보면, 콩가루 학번이나 당나라 부대 학번 같다. 일사불란함과는 안드로메다 은하만큼 거리가 멀다. 하지만, 우리 친구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색조로 은은하게 연주하고 있다. 그 하모니의 자유로움을 여유롭게 내 뇌리에 새기고 있다.

하산 길에는 난생처음으로 맨발로 황톳길을 걷는다. 수타면 반죽 같은 부드러움과 서늘함이 몸 전체에 상쾌함을 퍼트린다. 홀로 야외 텐트 바비큐 식당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친구를 위해서 서둘러 떠난다.

바비큐 식당에 도착하니 벌써 지글지글 고기 굽는 향내가 식욕을 한층 더 자극한다. 엄청나게 꼼꼼한 친구의 준비로 다양한 고기와 소주 맥주 폭탄주가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대학원 시절에 배우 정준호와 이병헌의 30:30 클럽(스트레이트 양주 30잔과 양주 맥주 폭탄주 30잔을 한자리에 마실 수 있는 능력자들의 모임) 이야기를 듣고 20:20 클럽에 도전한 이래로 폭탄주는 나의 최애 주류가 되었다.

맛나게 구워진 돼지고기와 폭탄주를 끝도 없이 밀어 넣는다. 인간의 식욕은 대단한 것 같다. 먹어도 먹어도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았던 고기와 폭탄주를 말끔하게 비우고 디저트로 김치볶음밥을 뚝딱 해치운다.


식곤증에 졸음이 밀려오지만, ‘동춘당’으로 서둘러 간다. 동춘당에는 다양한 축제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나는 동춘당의 존재를 알지 못해서, 처음에는 유명 한약방이 아닐까 상상한다. 안내문에는 동춘당은 송준길의 호를 따서 지은 저택이라고 설명한다.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양반 가옥이다.

그런데 동춘동 안쪽으로 들어가니 묘한 분위기의 집이 눈에 띈다. 빨간색의 한자 글귀를 긴 화선지에 써서 곳곳에 붙여 두었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형태의 충청도 굿을 ‘설경(設經)’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충청도는 양반 지역이라서 굿도 경전을 베풀 듯이 읊으면서 진행한다며, 실제 설경을 보여준다. 얼핏 들으면, 절간에서 스님이 불경 읽는 것 같다. 유교(儒敎)와 무교(巫敎)의 예상 밖의 조합이 낯설다.

동춘당을 뒤로하고, 대전의 명물인 ‘성심당’ 본점으로 향한다. 성심당의 시그니처 ‘망고시루’를 먹어볼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성심당 근처에 이르니, 먼저 도착한 친구가 엄청난 대기 인파를 알리며, ‘한밭수목원’으로 노선 변경을 제안한다. 역시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한밭수목원은 17년 전 즈음 대전 근무 시절에 종종 산책했던 곳이다. 한가롭게 나비가 꽃을 찾는 접수화(蝶隨花) 장면을 상상하며, 걷는다. 17년 전에는 한밭수목원이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지음(知音) 같은 친구들과 노니니,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친구들과 같이 추억을 쌓아가니, 시간이 빛처럼 나의 겨드랑이를 스쳐 간다. 아직 3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지만, 아쉬움이 밀려든다. 이제는 저녁 식사와 마지막 종착지 유성의 이팝나무 축제만이 남아 있다. 다만, 일기예보 상으로는 비가 온다고 했지만, 아직 비가 내리지 않는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유성 이팝나무 축제장으로 향한다. 많은 이팝나무는 이미 꽃이 져버렸다. 대신에 온천 축제가 활발하다. 도심 한가운데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니. 따스한 온천물에 발을 담그니, 새벽부터 거닐며 힘들었던 발바닥이 구들장에 누운 듯이 편안해진다.


24년 5월 따스한 봄날, 일상의 일탈을 꿈꾸며 떠난 대전 여행을 마감하며, 어느 동아리 선배가 봄 소풍 축사에서 읊었던 시구절을 떠올린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처음에는 그 선배가 창작했던 걸까 생각하다가, 네이버에서 검색해 본다. 그 결과, 이병주가 자신의 대하소설 ‘산하’의 서문에 쓴 한시 “褪於日光則爲歷史, 染於月色則爲神話”를 번역한 글귀라는 걸 알게 된다. 이후에 나는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는 시구절이 너무 좋아, 비슷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되뇌곤 한다. 오늘은 이병주 선생의 글귀를 ‘친구들의 호흡에 취하면 추억이 된다(醉於友波則爲追憶)’로 변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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