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
1999년 워쇼스키 감독의 ‘매트릭스’를 보면서, 네오가 총알을 피하는 신공에 매료된 나는 ‘매트릭스’가 단순한 공상 과학 영화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10년쯤 흐른 뒤에, 우연히 문화 산책 칼럼에서 ‘매트릭스’의 함의를 읽고 나서, ‘매트릭스’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매트릭스’의 메시지를 곱씹어보기 위해서 영화를 다시 보면서, ‘매트릭스’의 메타포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보니, 새삼 가상 세계에서의 죽음이 실제 세계에서의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엄청난 임팩트였다.
우리가 측간에 들어가서는 똥 냄새를 맡을 수 없듯이, 우리는 이미 ‘매트릭스’의 가상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화장한 얼굴’이 ‘맨 얼굴’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엄청난 화두가 된 ‘매트릭스’ 덕분에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비사회’가 과시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를 비난하기 위해서 제시된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품 가방을 좋아하는 와이프를 훈계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 주류 백인(WASP; White Anglo Saxon Protestant) 남성 부의 상징 세 가지에 대해서 들었다. 그것은 ⅰ) 로렉스 시계, ⅱ) 아르마니 수트, 및 ⅲ) 벤츠였다. 의문이 들었다. 대한민국 주류 남성에게 적용해 보면, ⅲ) 벤츠는 인정할 수 있으나, ⅰ) 로렉스 시계와, ⅱ) 아르마니 수트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대한민국 마초의 세계에서는 ⅰ) 로렉스 시계와, ⅱ) 아르마니 수트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ⅲ) 벤츠의 약발은 확실하여, 대한민국 마초가 수입차에 열광하는 것이나, 대한민국 여성이 명품 가방에 열광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상품 소비를 통해서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상품 객체로는 다양한 자아의 단면을 표현하는데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품 객체의 고갈로 인하여, 사람들은 새로운 상품 객체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새로 제시된 상품 객체가 사람의 이성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기술 사상이나, 문학 작품 또는 예술 작품이었다.
기술 사상이나, 문학 작품 또는 예술 작품에 대해서 소유권과 유사한 개념을 인정하기 위해서 제시된 제도가 바로 지식 재산권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기술 사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특허권이고, 문학 작품 또는 예술 작품을 상품화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 저작권이다.
이러한 지식 재산권은 인간이 창조한 무형의 산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긴 역사적 고뇌와 사회적 합의 결과이다. 예술가와 발명가는 언제나 자신의 머릿속에 무언가를 길어 올렸다. 그러나 그 산물이 이 세상에 나오면, 금세 다른 이들의 손에 의해 베껴지고, 흩어져 버렸다. 이때 창작자의 땀과 고통은 평가받지 못하는 부조리가 생겼다. 지식 재산권은 바로 이 창조와 모방의 긴장 속에 태어난 장치다.
철학적으로 보면 지식 재산권은 인간이 자기 사유와 창작을 ‘나의 것’이라 부를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의 흔적을 인정받는 방식이기도 하다. 돌 위에 이름을 새기듯, 발명과 문학, 음악과 디자인 속에 인간은 자신을 새기고, 법은 그것을 잠시 지켜주는 울타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지식 재산권은 햇볕 아래 피어난 발명을 지켜주는 울타리, 밤하늘에 울리는 노래를 잊히지 않게 묶어두는 실, 그리고 인간 창조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사회가 함께 세운 등불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 들어서, 우리 모두의 열정적인 지적 활동의 산물인 기술 사상, 문학 작품 또는 예술 작품이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한반도를 넘어 지구촌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매트릭스’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 우리들에게 지식 재산권이 꽃이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