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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Jun 09. 2020

현대

부럽다. 자연스러운 현대인들이.

* 사진은 최근에 개인정보가 도용되어 부정 결제가 발생한 토스사 고객 인터뷰다.



내게 토스는 '일을 참 말끔히 하는 회사'라는 이미지다. 현대(現代: 지금의 시대)적인 회사의 기준은 그것을 떠올리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나, 토스는 내가 지금까지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범주 안에 있는 가장 현대적인 회사다.



토스의 어떤 면모가 '말끔하다, 현대적이다'라는 감상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완벽에 가까운 권한 분리와 분리된 권한에 지는 무게 있는 책임감, 그리고 쉼 없는 기민함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렇게 언급한 세 가지 요소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는데, 그 목적이란 '회사의 성장'이다. 부디 나의 언급이 토스의 성공을 사후 분석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기 바란다. 지금 이 글은 '현대적'임을 느끼는 요인에 대한 일개 개인-노동자-의 감상이다.



다시 토스로 돌아와서, 오늘날 토스는 초고속으로 성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쑥쑥 자라고 있다. 나는, 감히 예측컨데, 토스가 계속 성장할 거라 본다. (내 팬심으로) 토스는 현대를 대표하는 회사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가장 강력한 고객층은 토스와 가장 단단한 강도로 점착되어 서비스를 이용한다.



나는 이번에 발생한 개인정보 도용 부당 결제 사건에 대한 처리도 현대적이었다-고 감상한다. 이들은 써드파티 개인정보 도용 사건과 해킹을 명백히 분리하고 피해 범위를 명료하게 선정했다. 토스는 공지에 "사용자분들께서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상세히 설명드리고자"한다는 단서까지 붙여가며 본 사건의 권한을 명백히 밝혔다(주석 1, 20/06/09 11:12 확인).


본문에 첨부한 인터뷰 사진에서도 토스는 나무랄 것 없이 현대적인 대응을 했다. 유사 공학인으로써 본인은 토스의 대처가 빼고 더할 곳이 없다고 평가한다. 토스의 답변을 받은 인터뷰이의 진술에 따르면 토스는 이번 결제건에 대하여 "좋게 이야기할 때는 결제가 끝난 거라 어떻게 할 수 없다, 해킹된 것 아니냐고 항의하니까 갑자기 책임지고 환불해주겠다고..." 말했다. 이 문장은 두 가지 사실의 결합으로 보이는데, 하나는 (전산 조회 결과 이상이 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결제가 이루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항의 이후에 고객 센터에서 고객 만족 의무를 지키기 위해 조건 없는 환불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토스에 대처에는 빼고 더할 말이 없다. 가만히 이 문장을 들여다보면 '음...' 하다가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일견 찜찜함이 남는다.


나는 오랫동안 이러한 종류의 찜찜함을 안고 있었고, 늘 이 찜찜함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이것을 밝히고, 부술 수 있을 때 나는 성장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장이란 가깝게는 내가 '토스인'이 되고 싶다는 이상의 표현형이고, 더 나아가서는 현대 사회에 잘 녹아든 한 인간처럼 보이고 싶다는 바람의 투영이다. 그렇지만 나는 늘 어떠한 종류의 '찜찜함' 때문에 최신 유행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느꼈고, 좌절했다. 현대인 중에는 최신 유행을 멋져하고, 그것을 열심히 따라는 가는데 어딘가 어색한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애석하게도 현대 기술사회에서 유독 이러한 이물감을 자주 느꼈다. 나도 주류 사회에 적합한 사람이고 싶은데, 나와 같은 인간상은 현대에 쉬이 동화되지 못하고 자신과 현대와의 거리를 반복해서 가늠하는 것이다.



환원주의적 시각에서, 이러한 찜찜함은 현대 공학인과 대화하면서도 자주 느낀다. (내 기준) '현대 공학인 집단'은 '대중에게는 공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실은 어떤 단어들보다 객관화된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한다. 이들의 소통은 동질 집단에서는 이상할 것이 없다. 빠르고, 객관적이며, 효율적이다. 그렇지만 현대 공학인의 대화법은 이형 집단과의 소통에서 파열한다. 이 집단의 일체감은 깨나 단단해서, 현대 공학인 집단 근방의 사람들의 마음마저 '찜찜하'게 했다. 미국 드라마 <빅뱅 이론>에 나오는 공학인들은 감상자에게 유머로서 소비되지만, 주변인 주인공들에게는 표현할 길 없는 찜찜함(또는 불쾌함)을 선사한다. 이러한 현상은 유머로 소비되는 것을 지나 사회적인 분위기로까지 이어져서, "기술 업계의 독성 말투 고칩시다" 같은 글이 나오는 계기가 됐다(주석 2).


그렇지만 '기술 업계의 독성 말투 (...)' 글도 내 마음을 편케는 못 했다. 이 글은 '찜찜함'의 이유를 밝히기보다는 실천적인 성격을 띤다. 이것은 원인 분석보다 현상을 와해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는데 중점을 둔다. 그래서 '(소위) 일반인 왜 공학인의 말에 상처를 받지?'라는 물음, 그러니까 '찜찜함'과 유사어인 '상처'의 제공 이유를 분석하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두 가지 현상이 가져오는 '찜찜함'의 기원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을 '성장'이라는 막이 씐 사람들의 공통적 행위라고 바라본다. 앞서 토스는 권한을 분리하고, 권한 내에 지운 무거운 책임감과 기민함으로 현대적 회사의 면모를 갖췄다고 평한 바 있다. 현대 회사의 최대 덕목은 성장이다. 그런데 회사의 성장과 고객의 만족은 단어가 다르기 때문에, 일견 겹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빠른 성장은 다수의 고객을 만족시킨 결과라는 평가는 합당하다. 그러나 소수 고객은 (앞선 인터뷰이의 언급처럼) '갑자기' 책임지고 환불하는 속도에서 연결점을 잃고 방황한다. 소수 고객 만족은 '분위기'를 읽어야 하는데, 분위기란 정책(rule)보다는 인간의 뉘앙스에 가깝고, 뉘앙스란 초고속 성장의 근간인 초고속 판단과 거리가 있다. 따라서 고속 성장에서 이러한 뉘앙스를 느끼는 소수 고객들은 서비스 이용의 이유를 '스스로 납득해야'하는 성찰의 시간을 필연적으로 요구받는다.



'현대 공학인' 사례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 과학기술은 다수가 비동기적으로 쌓아 올린 찰흙 덩어리에 가깝다. 증가속도가 빠르고, 이미 축적된 양이 많다. 다수의 공학인들은 자신들의 과학이 '과학 철학'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망각할 만큼 많고, 빠른 정보 속에 던져진다. 위와 같은 현상에 소수 공학인들은 기술 속도를 따라가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태도를 체득한다. 평가(또는 감상) 하지 않고 객관적 사실만을 전달하는 것. 개별자의 실수를 감정 없는 언어로 드러내는 것,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기민하게 실천하지 않는 현상을 견디지 못하는 것-등의 행동 양식이다. 이들은 성공적인 '공학-발전을 위한 시간 집약적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터득하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의 소통 방식을 망각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고 배웠다. 이러한 명제를 지지하는 사람의 주장으로, 성장을 위한 최적 언어는 고객 만족을 위한 언어와 조금 그러나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리고 공학 지식의 빠른 집적을 위한 언어는 일반 사회적 언어와 조금, 그러나 구분되게 다를 것이다. 그것이 바깥으로 사용될 때 구조간 충돌이 발생할 수 있고, 관계는 영향력으로 드러난다.



목적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것-은 숭고한 자들의 행위와 유사해서, 나는 언뜻 두 사례에서 느껴지는 찜찜함이 숭고한 목적을 위한 희생물처럼 보이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에고를 표출하는 사람들보다 이들의 행위가 더 이타적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은 대의를 향한 돌진이 저차원적 욕구를 표출하는 행위보다 더 에고이스트적 행위로 읽힌다.



나는 두 집단을 여전히 동경한다. 그리고 동경은 욕망하면서도 속절없이 닿을 수 없는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현대-라는 시대관은 시간의 진행성 때문에 끝에 도달할 길 없이 계속해서 확장하는 속성이 있다. 결국 현대와 욕망의 대상이란 내가 되고 싶어 하지만 끝내 닿을 수 없는 공간이다. 만약 내가 그곳에 편승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더 이상 불편해하거나, 대상과의 거리를 측량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매사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며 숨을 쉬지 않듯. 그러나 지금까지는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다. 아마도 나는 현대인이라기보다 가까워지는 사람이며 구시대적 인물들의 존재에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 게시물-감상-을 이후로 찜찜함을 뛰어넘어야 할 대상, 숭고한 사건의 희생물로만은 바라보지 않게 됐다.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주지 않는다(...). 과정이 말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모든 것이 말한다.



[1] JTBC 보도에 따른 토스의 공지 https://toss.im/notice/9762

[2] 기술 업계의 독성 말투 고칩시다 https://edykim.com/ko/post/tech-has-a-toxic-tone-problem-lets-fix-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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