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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보물 같은 곳

2부(진짜이민)

by 김미현


K와 함께 아시아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장을 마치고 나오자 K가 말했다.


“Nearby, there’s a park. Want to see?”

(근처에 공원이 있는데, 가볼래?)


나는 잠시 망설였다.

피곤했고, 장바구니도 무거웠다.

하지만 문득 생각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어딘가로 나가 콧바람을 쐬던 K.

한국에서도 안 가본 곳이 드물었다.

우리보다 한국의 구석구석을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K가 이제 우리와 독일에서 산다.


집순이인 나와 나를 꼭 닮은 집돌이 아들과 함께 사는 일.

그건 K에게 쉽지 않은 변화였을 것이다.


K가 아시아마트에 함께 와주는 일은,

어쩌면 ‘충전’ 대신 ‘배려’를 택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노력 말이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K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 가보자.”




차로 몇 분 달리자,

눈앞에 비브리히 궁전이 나타났다.

궁전 앞에는 라인강이 펼쳐져 있었고,

그 곁으로 정원이 끝없이 이어졌다.


숨이 멎는 듯했다.


창경궁만 한 규모의 공간이 무료였다. 입장료도, 울타리도 없었다.

그 사실이 더 놀라웠다.


궁전과 분수, 잔디밭, 오래된 나무들.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펼쳐졌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오랜만에 긴 숨을 들이마셨다.


K가 옆에서 말했다.

“There are many places like this here. We should come again.”

(여긴 이런 데가 진짜 많아. 우리 다음에 또 오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 땅이 우리를 밀어내기만 하는 건 아니구나.





며칠 뒤, 우리는 아들을 데리고 다시 그 공원을 찾았다.

아들은 잔디밭을 달리며 외쳤다.


“와… 진짜 넓다!”


그 얼굴에 오랜만의 환한 빛이 번졌다.

그 순간, 나도 긴장이 풀렸다.

아이는 분명 이곳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은 그 공원 이야기를 학교에서 꺼냈다.


“엄마, 나 그 공원 얘기했어.

애들이 아무도 모르더라.”


나는 놀라서 물었다.

“바로 옆 도시인데도?”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주말에 같이 가기로 했어.”




그 주말,

아들은 친해진 여학생과 친구들,

그리고 여학생의 아버지와 함께

그 궁전 공원을 다시 찾았다.


우리는 집에서 기다렸고,

저녁이 되자 아들이 들뜬 얼굴로 돌아왔다.


“엄마, 오늘 진짜 재밌었어.

애들이 고맙다고 했어.

그 아버지도 멋진 곳 소개해줘서 고맙다고 하셨어.”


아들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날이었다.




처음엔 K와 나,

그다음엔 우리 셋,

그리고 마침내 아들의 친구들과 그 가족까지.


하나의 발걸음에서 시작된 경험이

열 사람의 기억으로 번져갔다.




그렇게 공원에서의 기억은 한동안 우리를 지탱해 주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독일이민 #가족에세이 #문화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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