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와 어림 왕자

by 김미현


나는 신진희에게 남자 떼는 법을 알려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거의

물고기에게 물 피하는 법을 설명한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그 여자는 남자를 떼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흘려보내는 여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십 년 동안 모르고 살았다.




진희와 나는 만나면 항상 슈퍼부터 간다.


그건 여행의 규칙 같은 거였다.


물 두 병.

캔커피 여섯 개.


슈퍼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찬 공기가 다리를 스친다.


진희가 캔커피를 계산대 위에 하나씩 올려놓는다.


“춘심아. 이걸로 되겠나.”


진희는 나를 늘 그렇게 불렀다.


춘심.


봄의 마음.


나는 봉지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된다. 우리 먹으러 온 거 아이잖아.”


계산대 남자가 계산을 멈추고 진희 얼굴을 쳐다본다.


그 표정을 나는 안다.


진희 얼굴을 처음 보는 남자들이

대체로 짓는 표정이다.


조금 놀라고

조금 호기심 있고

조금… 기대하는 얼굴.


남자가 말을 걸었다.


“Where are you from?”


진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엷은 미소를 띤 채.


나는 그 순간 남자 얼굴을 봤다.


남자는 이미

대화를 시작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나는 봉지를 들며 말했다.


“South Korea.”


그리고 진희 팔을 잡고 문을 나왔다.


밖 공기는 저녁 냄새였다.


진희가 물었다.


“춘심아.”


“왜.”


“내가 뭘 했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니가 뭘 하긴. 그냥… 니 얼굴이 했다.”


진희는 웃었다.


진희 웃음은 묘했다.


세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막상 보면

세상을 다 아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진희는 예뻤다.


하지만 그건 배우 같은 미인은 아니었다.


진희 얼굴에는

사람을 방심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눈은 늘 약간 웃고 있었고

입꼬리는 말하기 직전처럼 올라가 있었고

표정에는 경계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얼굴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말을 시작했다.


카페에서도,

서점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어느 날 우리는 해운대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진희가 갑자기 말했다.


“춘심아.”


“왜.”


“내가 만만해 보이는가 봐.”


나는 진희 얼굴을 봤다.


“뭔 소리고. 빙시야.”


진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들이 자꾸 말을 걸잖아.”


나는 모래를 발로 차며 말했다.


“그건 만만한 게 아니라 이뿌니까 그라지.”


진희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니라. 그냥 만만한 거라. 내가 쉬워 보이는가 봐. “


나는 바로 답했다.


“뭐라카노. 야. 잘 들어. 니나 내나 어릴 때 부모한테 이뿌다 소리 못 듣고 자라서 그런 거라. 그러이 삐딱한 거라. 누가 이뿌다카면 의심부터 하는 기라. “


진희는 웃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누가 좋다카면 우리는 바로 이 생각부터 하는 거지.

저 인간이 내한테 뭐를 빼먹을라 카노. 저 인간 저거 우째 함 해볼라꼬 저라는 거지. “


진희가 길을 걷다 멈췄다.

내 왼쪽 팔을 치면서 반달눈이 되었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에 맞춰 그녀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정 모르겠으믄 다 만나봐. 애끼다 똥 된다이. “


진희는 내 말에

진짜로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그저 웃겨서라고 생각했다.


그게 착각이었다.




몇 달 뒤 나는 수술을 했다.


병실 형광등은 항상 너무 밝다.


낮인지 밤인지 모르게 밝다.


문이 열리고 진희가 들어왔다.


꽃도 없고 과일도 없었다.


대신 진희 얼굴이 있었다.


진희는 의자에 앉자마자 말했다.


“야 춘심아.”


“왜.”


“니 기억나나.”


“뭐.”


“고등학교 때 화장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희 입술이 씰룩거렸다.


“쉬는 시간에 줄 길게 서 있었잖아.”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진희가 결국 터졌다.


“화장실 문에 니 글씨 붙어 있었잖아!”


“뭐라고. “


“기다리지 마시오!”


“그거 니가 썼잖아. 미친갱이야. “


나는 그대로 침대에서 터졌다.


진희가 침대를 치며 말했다.


“변비 주제에 뭘 그리 애를 썼더노!”


우리는 그날 밤을 새웠다.


진희는 웃다가 입술이 터졌고

나는 수술 부위가 덧났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진희에게 말했다.


“남자 떼는 법 알려주까?“


진희 눈이 반짝였다.


“뭐꼬 그거.”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우선 말이다. 남자한테 담배 심부름을 시켜.”


“담배?”


“말보로 레드. 한 보루. “


진희가 웃기 시작했다.


“그걸 사 오잖아?”


“응.”


“그럼 딱 까서 줄담배를 쫙 피.”


진희는 간이 의자에 앉아서 웃다가 벽에 머리를 찧었다.


나는 계속 설명했다.


“니 괜찮나? 에헤이. 아무튼 그래도 안 떨어진다?”


진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믄 돈을 빌리 달라 캐.”


진희가 숨을 못 쉬었다.


“그래도 안 떨어진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라믄 더 빌리 달라 캐.”


진희는 울면서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조언이 황당해서라고 생각했다.


그게 두 번째 착각이었다.




몇 년 뒤 나는 진희 집에 갔다.


해운대였다.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였다.


진희 식탁 위에는

와인 두 병이 있었다.


나는 물었다.


“누가 준 거고?“


진희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는 사람이.”


“남자 아이가?“


“응.”


나는 웃었다.


“그래서 니가 뭐 해줬는데.”


진희가 잠깐 생각했다.


“밥.”


“끝?”


“응.”


나는 진희 얼굴을 봤다.


“니 진짜 이상하다.”


진희가 웃었다.


“춘심아.”


“왜.”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뭐가.”


진희가 와인을 따며 말했다.


“사람들은 다 뭔가 주고 싶어 한다.”


나는 물었다.


“왜.”


진희가 말했다.


“기대가 있으니까.”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십 년 뒤


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




그날 진희가 말했다.


“춘심아.”


“왜.”


“니는 습자지 같은 사람이라. “


나는 물었다.


“뭐? 우이쒸. 내가 습자지면 니는 뭔데?


진희가 웃었다.


“나는 마분지.”


나는 그 말이

왜 그렇게 늦게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진희를

평생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처음 알았다.


나는 돈키호테였고

진희는 햄릿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모든 걸 정면에서 믿었고

진희는 모든 걸 어스름에 두고 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날 병문안에서

내가 그렇게 진지하게 설명했던


남자 떼는 법.


진희가 웃었던 이유는

그 조언이 황당해서가 아니었다.


진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자를 떼는 법이 아니라

남자를 남겨두는 법을.


어스름으로 두는 법을.




며칠 뒤 진희에게 메시지가 왔다.


“춘심아.”


“왜.”


“니 글 제목 정했다.”


“뭔데.”


진희가 말했다.


“어린 왕자와 어림 왕자. “


나는 그 문장을 보고 한참 웃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야 알았다.


그 제목이

내 이야기라는 걸.


나는 어린왕자였고


진희는


어림왕자였다.




#에세이소설 #초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