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웬만해서는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 취향에 맞지 않거나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라디오가 가진 힘을 알기에, 그 힘에 다시 중독될까 두려워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있다.
나의 라디오 편력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밤 10시에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11시가 다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살면서 처음으로 나만의 방을 가진 나는 텅 빈 방에서 라디오를 켜고, 그 소리를 배경 삼아 숙제를 하거나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신동엽이 진행하던 고민 상담 프로그램은 그 시절의 작은 위안이었다. 사연이 채택된 이들에게 주는 선물로, 당시 고가 청바지였던 '페레진'을 열에 아홉이 골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나를 진짜 사로잡은 것은 그 이후, 더 깊은 새벽 시간에 흘러나오던 사연 낭독 프로그램들이었다. 진행자가 누구인지도 모를, 이름도 지명도 없이 정제된 목소리가 읽어주는 사연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기폭제였고, 나를 심연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느 날 문득 무서워졌다. 이렇게까지 깊이 빠져들어도 괜찮은 걸까.
TV는 언제나 특정 인물, 특정 장소, 특정 사건을 비춘다. 우리는 화면 속 '그들'의 이야기를 구경하는 관객의 자리에 머문다. 하지만 라디오는 다르다. 눈에 보이는 장면이 없기에, DJ의 목소리는 곧장 청취자의 내면을 향해 파고든다.
"지금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DJ가 던지는 이 한마디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것이지만, 듣는 순간 '바로 나'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지는 마법을 부린다. TV가 "우리가 보여주는 이 장면에 집중하세요"라고 말한다면, 라디오는 "지금 당신이 있는 그곳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속삭인다. 각자 다른 상황에 놓인 수많은 청취자들을 하나의 공감대로 아우르는 그 멘트들은, 나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 시절의 경험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내가 라디오라는 매체에 유독 취약하다는 사실을. 사연 낭독이 들려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들은, 내 안의 감정과 기억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나를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이후, 라디오에 의식적으로 집중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쩔 수 없이 차 안에서 라디오를 켤 때도, 사연 프로그램 대신 뉴스나 음악 방송을 택했다.
어쩌면 라디오는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매체일지 모른다. 익명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정제된 사연 속에서, 우리는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맨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그 거울이 두려워, 스스로 문을 걸어 잠갔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라디오를 듣던 그 시절의 아찔한 몰입감이 떠오르곤 한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깊고 위험했던 위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