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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밍고 Aug 27. 2015

모든 것이
혼재하는 나라에서

안토니오 타부키의 <인도 야상곡>을 읽고

인도 야상곡, 안토니오 타부키, 문학동네(2015)


대로라면 정말로 살아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델리에서 먹은 지미 아저씨네 쵸우멘이 문제였는지, 자이살메르에서 먹은 노점상의 쵸우멘이 문제였는지 아무튼 간 쵸우멘이 문제였던 것은 확실했다. 바라나시로 넘어오는 기차에서부터 설사가 시작됐고, 잦아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풀렸다. '히즈라'라 불리는 여장 남자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연신 귀엽다 조롱했지만 나는 대꾸조차 할 수 없었고, 야심 차게 사서 입고 다녔던 내 알라딘 바지 밑단에는 점차 정체를 알 수 없는 황갈색 도트들만 늘어가고 있었다. 인도에 온 지 거의 3주차.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첫 물갈이가 시작된 것이다.


바라나시에 도착 후 머물렀던 숙소들의 선택 기준은 오로지 변기였다. 머무를 숙소는 가트 근처로 결정됐다. 조금 걸어 나가면 그 유명한 갠지스강이 보였다. 삶과 죽음이 맞닿는 곳이었다. 인도 사람들은 시신을 화장하여 갠지스 강물에 흘려보내는 일을 매우 신성히 여긴다고 했다. 망자들은 매일 이곳으로 실려왔고, 화장터의 불길은 잦아들지 않았다. 잦아들지 않기는 내 뱃속의 불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가는 족족 물이 되어 나를 빠져나갔다. 그것들도 아마 갠지스 강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숙소에서 멀리 나갈 수 없었다. 퀴퀴한 방 안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엽서 따위를 적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진 못 했다. 인도까지 날아와서 설사나 하고 있는 이야기를 굳이 써날린다는 것은 제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원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광활한 나라에서 근 일주일을 화장실에 갇혀 있었다. 변기를 부여잡고 인생 최고의 무력감을 맛봤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고, 건강했던 내가 간절히 그리웠다. 강물처럼 생각들이 흘러갔다. 나를 찾아 나선 최초이자 최후의 여행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육체의 감각이 어느 정도 여과되고 나면, 경험은 모호해져서 한껏 더 나은 이미지로 남게 마련이다." - 83p



3년의 시간이 흘러 오늘이 됐다. 기억의 편집술이란 참 대단하다. 그렇게 극한으로 몰렸던 시간들도 지나고 나면 이렇게 추억이 되어 버리니 말이다. 요즘처럼 무더운 밤에는 특히 더 그렇다. 인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젯밤 침대 위에서 <인도 야상곡>을 집어 들었던 이유도 그런 꼬리 물기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읽은 <꿈의 꿈>의 여운 때문에라도 당분간은 집어 들고 싶지 않았던 타부키였건만...  단 한 번의 호흡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버렸다. <꿈의 꿈>은 여러 번 끊어 읽을 수 있었지만, <인도 야상곡>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밤이 지나갔다. 장담컨대 나 아닌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인도의 북쪽을 여행했고, <인도 야상곡>은 인도의 남쪽을 배경으로 삼았다. 책에서 마주한 인도는 실제로 마주했던 인도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도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속고 또 속인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땅은 넓고 사람은 많다. 극심한 빈부의 차가 존재하고, 수많은 종교들은 저마다의 믿음을 과시한다. 모든 것이 혼재한다. 비우러 간다면 채우고 올 것이오, 채우러 간다면 비우게 될 것이다. 인도는 그러한 혼란 속에서 오직 한 사람 나를 마주하게 되는 곳이다.


<인도 야상곡>이 그려내는 열두 번의 밤 또한 존재의 단면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밤 속에서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모순된 모든 것이 온전하게 존재되는 시간들. 주인공 호스는 이러한 열두 번의 밤 속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사비에르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나가고 있었다. 책을 읽다 보니 <꿈의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문장과 문장의 틈새로 타부키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마지막 밤에 이르러서는 타부키의 꼬리를 물고 내가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이는 <꿈의 꿈>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순간이다. 바로 이 시점부터 소설은 이야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아니 오히려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 인해 이 소설만의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고 봐야겠다. 나는 어제 이곳 인도의 밤 속으로 빨려 들어왔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인도 야상곡>의 밤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3년 전 여행에서 느꼈던 그 묘한 느낌을 책을 통해 다시 느끼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꿈의 꿈에서도 몰랐다. 대단한 소설이다. 내가 꿈꿔왔던 인도 이야기가 이렇게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정말로요. 당신의 그 사진하고 약간은 닮았어요. 확대는 맥락을 변조하지요. 사물은 멀리서 봐야 해요. 선택된 부분은 신중히 보시기 바랍니다." - 1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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