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ing nothing for something
정치인은 두 갈래 길에 놓일 때가 많다. 사과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나 제3의 선택지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곧 ‘하지 않음으로써 함(無爲而治)’이다.
최근 한·미 관세 협상이 뜨겁다.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에는 너무 차갑다. 미국은 3,500억 달러(약 500조 원) 규모의 투자를 요구했다.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4,000억 달러 남짓임을 고려하면, 외환 보유고를 거의 통째로 내어주는 꼴이다.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미국의 25% 관세를 감수해야 한다. 우리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을 포기해야 할 판이다.
정부는 당장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사인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은 채 놔두고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을 줄이고 협상의 틈을 찾기 위한, ‘의도된 기다림’이다.
정치 뉴스는 매일같이 크고 작은 사건으로 가득하다. 대부분 정치인이나 정당, 조직의 책임이 발생하는 사안이다. 우리는 그 정치인이, 정당이, 위원회가 속시원한 입장을 내놓길 기다린다. 그런데 꽤 자주, 아무런 입장도 내지 않는 경우를 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입장을 내지 않더라도 시간은 흐르고, 숨겨진 진실이 밝혀지지도 하고, 또는 억울한 거짓이 드러나기도 한다. 침묵이, 하지 않음이 그대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침묵이 주는 메시지가 곧 전략인 때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 않음’이 결코 무(無)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이 더 명확해질 때까지, 상대가 먼저 입장을 내놓을 때까지, 혹은 (좋든 나쁘든) 대중의 관심이 흩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것은 소극적 회피가 아니라 능동적 전략일 수 있다. 정치적 제스처를 미루는 것도, 때로는 그냥 포기하는 것도 전략이라는 이야기다.
특히 국민의 생명이나 재산과 직결된 결정이라면 신중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트럼프 정부와의 관세 협상도 이런 맥락에서 당장 결과를 낼 수는 없다.
다만 언제나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 않음은 불통, 무능, 무책임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쟤가 말을 안하는 거보니 잘못한게 맞나보네" 생각하지 않겠는가.
정치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정치인의 행태에 답답함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답이 뻔히 보이는데 도무지 결정을 하지도, 사과나 인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하지 않음'이 무엇 때문인지를 읽어보는 것도 필요하다. 정치인의 무사안위를 위한 것인지, 국가와 국민의 공익을 위한 것인지 말이다.
정보가 쏟아지고 매일매일 새로운 이슈를 읽다보면 명확하지 않은 것에 조급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 의도된 기다림과 무시가 왜 이뤄지는지 생각해보자. 정치의 묘미는 늘 말과 행동 속에만 있지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순간에도 정치가 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