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바다였다니
비와 눈 중에 무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눈이라고 말하겠다. 눈 중에서도 소복소복 쌓이는 함박눈이 제일 좋다. 세상이 어떻든 간에 온통 새하얗게 만들어 주는 흰 뭉치들. 흰 것 중에 가장 차가운 흰 것. 솜털 같은 눈 뭉치가 팔랑팔랑 나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마저 희게 된다. 조용조용 눈이 오는 순간만큼은 다 괜찮을 것 같은 마음,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작고 연약한 것까지 모조리 얼릴 것 같은 잔인한 추위에도, 눈이 오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포근해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 좋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쌓인 마당은 어떤가? 마치 찜기에서 갓 나온 백설기를 보는 것 같다. 폭신폭신하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새하얀 백설기. 태어나 100일이 되면 나눠 먹는 축복의 떡 말이다. 나는 꼭 그 무결한 모습 그대로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발자국을 내지 않으려 멀리멀리 돌아갔다. 게다가 쌓인 눈을 유심히 바라보면 눈 한 알 한 알 모양들이 어찌나 정교하고 반짝반짝 예쁜 장신구처럼 생겼는지. 갖고 싶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금세 내 온기를 머금어 물방울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겨울에만 허락되지만, 결코 손에 쥘 수 없는 시린 아름다움.
반면 비는 싫다. 가끔 비를 즐기는 날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싫었다. 비가 오는 요란한 소리가 싫었다. 쏴아- 퉁퉁퉁 하고 바닥에 내리 떨어지는 소리.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인지, 하늘을 찢는 소리인지 소란스럽게 내 귓가를 맴도는 소리. 소리 없이 부슬부슬 내리는 날도 있지 않느냐고 한다면, 나에겐 습기에 제멋대로 고불고불해지는 앞머리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어쩔 수 없이 빗길을 걷기라도 하면 빗물을 잔뜩 머금어 바짓단이 축축해지는 것도 역시 싫은 포인트였다. 신발이 젖는 건 정말이지 찝찝함 그 자체다. 눈을 밟지 않는 이유와 정 반대로 비를 밟지 않기 위해 최대한 외출을 꺼려한다. 비가 싫은 이유 중 가장 최악은, 비가 오면 처량한 기분에 휩싸인다는 점이다. 비가 오면 괜스레, 분위기도 기분도 낮게 가라앉기 일쑤다. 멀쩡하던 내 인생을 한탄하기 시작한다. 비가 와서 슬퍼지는 인생이라니, 이것만으로도 비를 싫어하기엔 충분하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비와 눈은 같은 곳에서 왔다는 사실. 바닷물이 증발해 구름이 되고, 구름으로 이리저리 뭉치고 흩어지며 살다가 때가 되면 땅으로 내리는 게, 바로 비와 눈이라는 거. 그렇게 모두 한때는 바다였다는 생각이 들 때면, 좋고 싫고가 무슨 소용인가 싶다. 돌고 돌아 눈으로 나리기도 하고, 비로 내리기도 하는 얕은 마음의 순간이 드넓고 깊고 깊은 바다였다니, 결국은 바다였다니.
일기 예보를 보니, 곧 창 밖에 바다가 내리겠다. 한 때, 바다였던, 다시 바다가 될 작은 물방울들이 내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