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스타트업 대표가 투자자 앞에 앉아 있다.
피칭은 완벽했다. 기술력도 인정받았다. 그런데 실사단계에서 질문 하나에 막혔다.
"준법 경영 시스템, 어떻게 운영하고 계세요?"
대답이 없었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있는 구조가 없었다. 투자는 보류됐다.
이것은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2026년 현재 대한민국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입찰 입장권이 바뀌고 있다. SK·삼성 등 대기업들은 준법 경영 체계를 내부에 직접 이식하기 시작했고, 협력사에 대한 요구 기준도 함께 높아지는 추세다. 공공 프로젝트 입찰에서도 준법 시스템 관련 항목의 비중이 꾸준히 올라가고 있다. 이 흐름에서 뒤처진 기업은 거래 기회를 잃기 시작한다.
둘째, 투자자와 거래소가 보는 것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거래소와 VC들은 기술력만 보지 않는다. "데이터를 어떻게 확보했나?", "알고리즘 편향성은 관리되나?"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AI 기업은 상장 심사 과정에서 거버넌스 리스크가 약점으로 부각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거버넌스가 없으면 기업 가치에 할인이 붙는다.
셋째, 대표이사의 신변이 직접 위협받는다. 중대재해처벌법이 그랬듯, 부패나 법 위반 사고가 발생했을 때 기업이 ISO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면 '대표이사가 주의와 감독을 다했다'는 강력한 면책 근거가 된다. 시스템이 없으면, 그 모든 책임이 고스란히 개인에게 돌아온다.
기술은 빠르게 성장하는데 그 바닥은 모래처럼 되어있는 기업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바닥이 무너지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 시작은 언제나 같았다. 준법과 윤리의 기준을 몸으로 지키던 사람의 퇴사였다.
대부분의 중소기업, 스타트업에서 윤리는 사람 안에 저장된다.
"우리 대표님은 그런 거 절대 안 해요." "우리 팀장이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어요." 이런 말들이 그 증거다.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 사람들이 버텨주는 동안, 조직은 꽤 건강하게 돌아간다.
문제는 사람에게는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이다.
이직한다. 번아웃된다. 오너와 갈등이 생긴다. 때로는 그 좋은 사람이 결국 그 조직의 문화에 서서히 동화된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그 사람이 떠나는 날, 그 사람이 지키던 기준도 함께 떠난다.
도덕을 믿는 조직은 사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반드시 떠난다.
실사 과정에서 투자자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순간은 숫자가 나쁠 때가 아니다. "그건 ○○님이 알아서 관리하고 있어요"라는 대답이 나올 때다.
그 한 마디가 투자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이 회사의 리스크 관리는 특정 인물의 역량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일 나가면? 그 관리도 사라진다.
시스템을 만드는 조직은 다른말로 구조를 믿는 조직이라는 것이고 구조화된 조직은 자정능력과 함께 투명성을 가지고있다. 그리고 투자자는 언제나 구조에 돈을 건다.
이제 시장은 이를 '청렴 프리미엄'이라 부른다. 시스템이 갖춰진 기업은 IPO나 M&A 시장에서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반대로 시스템이 없는 기업에게 ISO는 선택이 아닌 '사업 운영권' 그 자체다. 이 입장권 없이는 대기업의 공급망에도, 공공 프로젝트의 입찰장에도 발을 들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것이 내가 ISO 37001, 37301 같은 국제표준 경영시스템에 주목하는 이유다. 이 표준들이 하는 일은 단순하다. 사람 안에 저장되어 있던 윤리와 기준을, 조직의 구조 안으로 이식하는 것. 접대비 한도는 얼마인가. 어떤 행위가 금지되는가. 리스크가 발생했을 때 누가, 어떤 절차로 대응하는가. 이것이 규정집 한 줄로 명문화되는 순간, 그 기준은 더 이상 특정인의 양심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오해를 하나 짚고 가야 한다.
ISO 인증이 그 기업의 도덕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인증을 받고도 비윤리적인 일을 저지른 기업은 얼마든지 있다. 서류는 완벽한데 현장은 딴판인 경우도 있다.
과거에는 종이 서류만 잘 갖춰도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심사 방식은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 기업이 구축한 규정이 실제 데이터와 업무 프로세스 안에서 얼마나 실효성 있게 작동하는지를 더 면밀히 들여다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서류상의 윤리'와 '실제 운영' 사이의 간극을 유지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ISO를 '도덕 인증서'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부른다. '구조가 존재했다는 증거.'
사고가 났을 때, 그 기업이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면 말이 달라진다. 대표이사가 "나는 주의와 감독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국제표준 수준의 근거가 생긴다. 중대재해처벌법의 논리와 같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성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반대로, ISO 없이 윤리적인 기업은 어떤가.
그 윤리가 누군가 떠나는 날 함께 떠난다. 그리고 그때 남는 것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리스크에 노출된 경영진이다.
대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준법 경영 시스템을 내재화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확인된 흐름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자연스럽게 거래 상대방에게도 요구되기 시작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었던 시대는 서서히 끝나가고 있다. 한국거래소 역시 상장 심사에서 거버넌스 리스크 관리 체계를 더 면밀히 들여다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AI 스타트업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질문이 더 날카로워진다.
"이 AI 모델, 학습 데이터는 적법하게 확보했나요?" "알고리즘 편향성은 어떻게 관리하고 있나요?"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발자국은?"
공장이 없는 AI 회사에도 '공정'은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 생명주기, 즉 SDLC가 그것이다. ISO 9001은 그 공정이 추적 가능하고 관리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AI 모델 하나를 학습시키는 데 드는 막대한 전력 소모는 이제 글로벌 협력사 선정 기준이 되었고, ISO 14001은 "우리는 에너지를 낭비하며 AI를 돌리는 회사가 아니다"라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2023년 12월 출판된 ISO 42001은 AI 경영시스템 자체를 다룬다. 윤리적 설계, 편향 관리, 리스크 통제. 여기에 정보보안(ISO 27001)과 개인정보보호(27701)가 결합될 때, 투자자와 고객이 요구하는 Full-Stack 신뢰가 완성된다. 거버넌스(37301)가 조직의 두뇌라면, 42001은 AI의 윤리 설계도이고, 27001/27701은 그 모든 것을 지키는 성벽이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퍼즐의 구멍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연결되는 순간, AI 스타트업은 단순한 기술 회사가 아니라 신뢰를 설계한 회사가 된다.
"필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죠? 우리 같은 규모에서 현실적인가요?"
경영진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이다. 현업에서 체감하는 수치를 솔직하게 말하면 이렇다.
임직원 50~100인 규모의 중소 IT 기업 기준으로, ISO 37001과 37301을 통합 도입하는 데 드는 기간은 약 6~8개월이다.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3개월, 실제 운영 실적을 쌓는 데 3개월이 필요하다. 비용은 기업 규모와 기존 사규의 완성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보다는 컨설팅 업체 두세 곳의 견적을 비교하는 것이 현명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생각보다 부담이 크지 않은 방법들이 있다는 점이다.
실무자가 알아야 할 세 가지 효율화 포인트가 있다.
많은 기업이 ISO 인증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실수는 'ISO 전용 매뉴얼'이라는 이름의 두꺼운 서류 뭉치를 새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실무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심사원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 화려한 새 서류'가 아니라, '현장에서 때 묻으며 작동하던 기존의 규칙'이라는 점이다.
심사원은 정답을 알려주는 선생님이 아니다. 그들은 기업이 세운 기준이 ISO의 요구사항을 어떻게 충족하는지 그 '논리'를 확인하러 오는 감시자다. 예를 들어, ISO 37001이 '인사 절차의 투명성'을 요구할 때, 기업은 굳이 새로운 규정을 만들 필요가 없다. 이미 사용 중인 취업규칙 내의 징계 규정이나 채용 프로세스를 펼쳐놓고, 이것이 어떻게 부패 리스크를 차단하고 있는지 심사원에게 '번역'해 주면 된다.
Gap Analysis(격차 분석)라 부르는 이 작업은 단순히 서류를 정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방식으로 리스크를 관리해 왔고, 이것이 ISO 표준의 이 조항과 일맥상통한다"는 기업만의 논리를 세우는 과정이다. 심사원은 그 논리가 타당한지, 그리고 실제 현장에서 그 논리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입증하는 증거를 본다.
결국, 현장의 언어로 기록된 기존 사규가 ISO라는 국제 표준의 언어와 어떻게 매핑되는지 증명하는 것이 핵심이다. 심사원에게 "우리는 당신들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새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기업보다, "우리는 이미 우리만의 방식으로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고 당당히 논리를 펼치는 기업이 심사대 위에서 훨씬 더 강력한 신뢰를 얻는다.
많은 기업이 부패방지(37001)와 준법경영(37301)을 별개의 프로젝트로 보고 따로따로 인증을 받으려 한다. 하지만 이는 엔진은 하나인데 차체만 두 개를 만드는 격이다. ISO의 모든 경영시스템 표준은 HLS(High-Level Structure)라는 공통의 뼈대를 가지고 있다. 즉, 리스크를 분석하고, 리더십을 발휘하고, 성과를 측정하는 조항의 번호와 구조가 사실상 일치한다는 뜻이다.
따로 추진하면 비용과 시간이 두 배로 드는 것은 물론, 현업 부서에서는 "준법 서류 따로, 부패방지 서류 따로" 제출해야 하는 행정적 재앙이 벌어진다. 통합 매뉴얼 하나로 두 인증을 동시에 취득하는 것은 문서 관리의 부담을 줄이는 기술일 뿐만 아니라, 기업의 거버넌스를 '하나의 언어'로 통합하는 전략적 선택이다.
여기서 심사원이 주목하는 포인트는 '정합성'이다. 부패방지 시스템은 거대한 준법경영 시스템 안의 아주 중요한 일부여야 한다. 심사원에게 "부패방지 리스크는 37001 메뉴얼에 있고, 일반 법규 리스크는 37301 메뉴얼에 따로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심사원은 이 회사가 시스템을 '위해(For)'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 쪼개놓았다고 판단한다.
통합의 진짜 묘미는 '중복의 제거'와 '빈틈의 발견'에 있다. 37301을 통해 우리 비즈니스를 둘러싼 전체 법규 리스크를 조망하고, 그중 가장 치명적이고 유혹이 강한 '부패'라는 영역을 37001로 정교하게 타격하는 구조를 짜야 한다. 이렇게 통합된 시스템 안에서는 하나의 인사 교육, 하나의 내부 감사, 하나의 경영 검토 보고서만으로도 두 가지 국제 표준을 완벽하게 충족할 수 있다.
결국, 통합은 효율을 넘어선 '신뢰의 밀도'에 관한 문제다. 조각난 규정이 아닌, 하나의 일관된 철학으로 흐르는 통합 시스템만이 "우리는 리스크를 파편화하지 않고 전사적 차원에서 장악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경영지원 부서가 ISO 도입안을 올릴 때 대표이사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그래서 이거 따면 얼마를 더 벌어오는데?"라는 물음이다. 이때 실무자가 꺼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현실적인 카드는 국가 예산을 활용해 기업의 방어막을 구축하는 '리스크 보험' 전략이다. 2026년 현재, 중소벤처기업부와 각 지자체는 공급망 실사 대응과 ESG 경영 확산을 위해 ISO 37001/37301 취득 비용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고 있다.
많은 중소 IT 기업이 몰라서 놓치고 있지만, '수출 바우처'나 'ESG 경영 지원 사업'을 활용하면 컨설팅부터 인증 심사비까지 총 소요 비용의 50%에서 많게는 80% 이상을 정부 예산으로 충당할 수 있다. "비용 대비 이익이 없다"고 말하는 대표에게, "우리 돈 20%만 투자해서 글로벌 시장에서 요구하는 100%의 신뢰 자본을 획득하고, 경영진의 법적 책임까지 방어하는 보험에 가입하자"는 제안은 거절하기 힘든 매력적인 투자 대비 효율를 가진다.
여기서 심사원보로서 덧붙일 수 있는 핵심 통찰은 '정부 지원 사업의 진단 과정이 곧 사전 모의 심사'라는 점이다.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 공식 심사 전 전문가의 진단과정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과정에서 우리 회사가 세운 리스크 판단의 논리가 국제 표준과 얼마나 부합하는지 미리 검증받을 수 있다. 즉, 나라 돈으로 전문가의 과외를 받고, 그 결과물로 공식 인증까지 따내는 완벽한 리스크 관리 시나리오가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정부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용을 아끼는 행위를 넘어, 우리 기업이 국가가 권장하는 '준비된 기업'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대내외에 공표하는 일이다. 자금이 부족해서 시스템을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깔아준 판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진짜 리스크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절반이다.
37001/37301이 조직의 바닥을 다지는 기초 공사라면, AI 기업에게는 한 단계가 더 남아 있다. "우리 AI는 어떻게 설계되었는가. 데이터는 윤리적으로 확보했는가. 편향은 관리되고 있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 ISO 42001이다. 그리고 이것은 37001/37301과는 결이 다른, AI 기업만의 고유한 과제다.
이 주제는 따로 깊게 다룰 필요가 있다.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다.
이 모든 시스템은 저절로 작동하지 않는다.
조직 구성원 교육, 내부 신고 채널 운영, 채용 단계에서의 리스크 스크리닝, 성과평가에 윤리 지표 반영.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시스템이 살아 숨쉰다. 그리고 이것은 법무팀이 혼자 할 수 없다. 경영진의 선언만으로도 안 된다.
전략적 HR의 역할이 여기 있다. 단순히 사람을 뽑고 급여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특정 인물 없이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 그것이 기업의 무형 자산 가치를 결정하고, IPO 심사대 위에서 기업을 지키는 일이다.
기술은 순식간에 복사된다. 오늘 출시한 AI 모델이 내일 경쟁사에 의해 비슷한 형태로 등장하는 시대다.
하지만 신뢰 가능한 구조는 복사되지 않는다. 그것은 수개월의 설계와 수년의 운영을 통해 조직의 근육 속에 이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대표이든, 실무자이든, HR 담당자이든 한 가지만 기억했으면 한다.
가장 강한 기업은 가장 빠른 기업이 아니다. 가장 쉽게 무너지지 않는 기업이다. 그리고 그 단단함은 기술 스택이 아니라, 아무도 떠나지 않아도 작동하고 누군가 떠나도 흔들리지 않는 구조에서 온다.
그 구조를 만드는 일. 그것이 AI 시대에 진짜로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