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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ul 24. 2019

[영화] 풀잎들

생의 선분

바니타스가 상징하는 것은 [vanité] 단어의 뜻 그대로 ‘헛됨, 공허함’이다. 바니타스 회화는 전염병이 휩쓸고 간 죽음의 시대에 남은 삶의 모습을 표현한다. 진중권은 “바니타스에서 죽음은 더 이상 외부에서 찾아오는 낯선 손님이 아니다. 여기서 죽음은 삶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 삶 그 자체 속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이라고 피력했다. 이 영화는 홍상수가 재구성한 21세기의 바니타스 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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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바니타스는 '도상'이다.
극적인 도상은 삶과 죽음의 불가분성을 일깨우면서 역설적으로 '삶의 진정성'을 회복할 것을 엄숙하게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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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홍상수의 바니타스는 삶과 죽음이라는 도상을 해체한다. 아예 '점과 선'의 관계로 환원한다. 점과 선의 관계란, 선이 있어야 점을 논할 수 있고 점이 있어야 선을 논할 수 있는 관계다. 점은 저 홀로 점일 수 없고 선은 저 홀로 선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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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의 관계로 잘게 쪼개어진 삶과 죽음은 그래서 원래 자기 모습이 어땠는지 알 길도 없이 서로 엉기어서 여기에 죽음이 있었던가? 아니 그보다도 삶이 있었던가? 하면서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떤 경계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비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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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쌍의 남녀가 나누는 '죽음'에 관한 대화를 엿듣다 보면 사실은 '삶'에 대한 대화인지 점점 알 수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살한 친구, 자살을 시도한 자기, 자살한 연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달뜬 억양으로 정사를 속삭이고, 후배의 집에 얹혀살고 싶어서 염치없는 부탁을 하고, 우리는 사랑했을 뿐이라면서 억울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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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정말 아름(사실상 홍상수)의 말대로

'별거 아닌 것들. 다 죽을 거면서. 죽은 친구가 옆에 있어도 자기 죽을 건 생각 안 하는 것들'인 것이다. 삶에 죽음이 있기나 한 듯이 열렬하게 살아있는 그들을 보면서 홍상수는 '그러니까 저렇게 단정하구나. 예쁘고 단정하게 잘 놀자.'라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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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비아냥에 가깝다. '단정'하다는 것은 우울과 혼란, 광기를 천착하는 예술과는 정반대에 속하는 것이며 고뇌 없이도 득할 수 있는 그저 '예쁜'것이다. 죽음을 알지 못하고 삶에 집착하는, 단정하고 예쁜 것들. 이 가련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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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어쩌면 부러움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살아있다는 괴로움. 죽음에게 빚지고도 끈질기게 삶을 구걸하는 '인간성'에 대한 자각. 그 끝에 다시 인간성에 대한 순응 혹은 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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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름이 이렇게 덧붙인다.
결국은 사람은 감정이고 감정은 너무 쉽고 너무 힘 있고 너무 귀하고 너무 싸구려고 너무 그립다.
그렇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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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화는 아름이, 아니 홍상수가 내내 자신이 관찰하며 몰래 첨언했던 그 단정한 것들 사이에 슬며시 끼어들면서 끝난다. 금방 부서질 듯 위태롭게만 보였던 관계들, 죽음들로부터 시작했던 논의에 점찍기를 보류하고 다시 한번 생의 선분을 그어보려고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꽤 맘에 들었다. 그동안의 홍상수 영화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느꼈다. 감독 개인의 사생활을 떠올리면 솔직히 역겹지만 차 떼고 포떼고 영화만 보면 이 정도 기록을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본다. 선뜻 추천을 하기는 망설여지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는 밤에 어울리는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역시나 술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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