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막무가내 태국을 가다!

'무전무식! 좌충우돌! 막무가내들의 세계 유랑기!'

by 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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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돌고,

오늘도 어김 없이 해는 뜬다.


눈을 떴을 때, 햇살은 이미 거실 바닥을 맛있게 핥고 있었다.

아침 햇살은 눈부셨고, 쏟아지는 햇살에 나는 눈이 멀 것만 같아 인상을 찌뿌려야만 했다.

침대맡 시계는 정확히 6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날씨 죽이네... 여행 떠나기 딱 좋은 날씨네.. 근데 왜 이렇게 밝지?"

순간 왠지 모를 싸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친다.

다시 시계를 확인하는 순간, 내 심장은 비행기 엔진 소리보다 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 오전 8시 비행기 아냐?"

뇌세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퇴근을 선언했다.

"망했다. 아니, X됐다!"

방 한구석에는 어제 싸다 만 짐들이 마치 패배한 군상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순간 내 몸 안의 잠자던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며 칫솔, 속옷, 티셔츠 눈에 보이는 대로 가방에 처넣었다.

대충 옷을 걸치고 집을 나서며 힐끗 시계를 확인한다.

6시15분.

이건 신기록이다. 기네스북에 등재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 인생의 '비루함 카테고리'에서는 단연 금메달감이다. 양말 한 짝은 짝이 맞지 않았고, 면도기도 챙기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내 인생은 짝짝이 양말 같으니까.

집을 나서며 핸드폰을 확인한다.

'부재중 통화 7건'

내 안의 초인적인 능력을 확인한 감격도 잠시.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액정화면이 바뀌며 요란하게 진동하는 핸드폰이 현실을 일깨운다.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전화기 너머로 철룡의 사자후가 들려온다.

"이 ㅆㅂ놈아, 너 어디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친구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 마리 굶주린 짐승의 포효에 가까웠다.

나는 엑셀을 밟았다. 부천에서 서울까지 단 15분만에 주파했다. 이 순간 모든 물리 법칙은 시간의 제약앞에서 잠시 외출 중이었다.


나는 부천에서 서울로, 흥분한 친구 녀석들을 픽업하자마자 다시 공항으로 내달렸다.

"야, 비행기 못 타면 오늘 인천 앞바다가 네 무덤인 줄 알아라."

농담이 아닌 걸 알기에 나는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정말이지 액셀을 바닥끝까지 밟았다.

그렇다. '철용' 그는 이런 상황에서 농담을 할 만큼 고차원적인 지능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인간의 탈을 쓴 터미네이터였다.

우리는 공항고속도로 위를 나스카 레이스에 참전한 레이서처럼 달렸다. 과속카메라를 피해 먼지를 날리며 갓길을 질주할 때는, 정말이지 우리가 마치 은하철도 999에 올라 탄 것이 아닌가 착각마저 들었다.


마곡에서 출발한지 정확히 30분 만에 눈 앞에 공항이 보인다.

안도의 한 숨도 잠시. 공교롭게도 공항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음.. 차들이 좀 많네.." 철룡이 한 마디 한다.

한 바퀴를 돌았지만, 빈 자리는 쉽사리 보이질 않는다. 그 사이 피 같은 5분이 흘렀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ㅆㅂ 뭔 차가 이리 많아."

청룡의 목소리톤이 달라지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정치권까지 욕하기 시작한다.

"ㅆㅂ! 세계에서 손꼽히는 일등 공항 주차시설이 왜 이렇게 열악한건데!"

그렇게 돌고 돌다 어렵게 한 자리를 발견했다. 헌데 자리가 좀 이상하다. 옆 차가 선을 밝고 주차해놓은 바람에 차 한대 들어가기 좀 애매한 포지션이다.

이제 1년 남짓 된 소중한 애마를 이런 자리에 내팽게치고 먼 길을 떠나자니, 왠지 깨름찍한 마음이 든다. 순간의 망설임도 잠시. 어김없이 뒷좌석에서 짐승들의 포효가 들려온다.

"그냥 박아 넣으라고, 이 ㅆㅂㄴ아!"

철룡과 민수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렇다. 옆 차선을 침범한 오만한 주차 행위 따위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찜찜한 마음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나였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녀석들과의 하드보일드한 여행은계획때부터 이미 예견된 재앙 같은 것이었다.

찜찜함에 뒤처지는 나를 향해 어김없이 거친 욕설들을 쏟아내는 그들이다.

아~ 저런 녀석들과 태국 여행이라니, 시작부터 기대보단 걱정이 앞선다.

어쨌든 이 순간 중요한 건 어떻게든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히 뛰었다.


"야! 여기가 아니잖아! 반대 방향이잖아!"

인천공항이 이렇게 넓었었나? 3층 출국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이미 실신 직전이었다. 방향 감각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녀석들이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니 효율성은 떨어질 수 밖에. 좌충우돌 이리갔다 저리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여기서 그들을 놓치면 끝이란 생각에 죽어라 그들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셋 다 큰 짐이 없어 티켓팅만 간신히 마치고 출국 수속을 끝내고 난 후 남은 시간은 단 15분 남짓.

엎친데 덥친 격 하필 게이트를 확인해보니 공항 맨 끝자락이다.

"저가 항공의 서러움이다, 진짜..."

한탄할 새도 잠시 뿐

"저쪽인거 같은데.."

내 손가락이 방향을 가리키기 무섭게 녀석들이 튀어나간다. 그렇게 정확히 마감 10분 전 간신히 게이트 앞에 도착한 우리들이다. 그런데 게이트 바로 앞에서 '민수'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생각에 잠긴다.

"왜? 무슨 일 있어?"

"담배. 담배가 없어. 담배를 사야겠어."

"미쳤냐? 안돼! 10분 남았어!"

"지석아! 너 비행기 잠깐만 잡고 있어. 나 안 돌아오면 비행기 잡아둬!"

"뭐?!"

내 답을 듣기도 전에 민수는 쏜살같이 면세점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 그는 비행기가 무슨 마을버스인 줄 아는 녀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게이트앞 직원들이 '라스트콜'을 외치고 있었다.

"한지석님! 강철룡님! 박민수님! 마지막 탑승 안내입니다!"

게이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발을 동동 구르기를 몇 분. 직원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지며 뒷통수가 따갑다 못해 뜨거울 지경에 이르러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들이다.

탑승 마감 5분 전에야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나타난 그의 한 손엔 마치 승자의 전리품과도 같은 담배 두 보루가 들려 있었다.


우리가 비행기에 타자마자 곧바로 문이 닫히고 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멈춰 세운 세 명의 망나니를 향한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우리는 자리로 향했다.

땀 냄새와 비릿한 아드레날린이 기내를 떠돌았고, 외국인 승무원이 우리를 바라보며 눈을 파르르 떠는 게 느껴질 무렵 비행기는 지상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외국인 스튜어디스의 경악 어린 표정을 외면한 채, 우리는 이미 전후반 90분을 다 뛴 축구선수마냥 좌석에 널브러졌다.

아~ 방콕에 도착하기도 전에 에너지를 120% 소진해버린 느낌이었다.

참으로 개판이다.

그렇다. 이게 바로 막무가내들의 여행이지.

우리들의 본격적인 수난기는 이제 겨우 '이륙'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