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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푸딩 Sep 21. 2015

휘핑크림을 위한 양심

먹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그것의 수도 없는 유혹 - 오렌지푸딩


 수십 가지의 외래어가 적힌 메뉴판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인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어서 속이 헛헛한 탓에 카페를 찾았다. 어제 회식이 있어 과식을 한 것이 마음에 살짝 걸리지만, 그것은 어제의 일. 오늘은 우유가 들어간 음료를 선택해도 될 것이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밥을 먹을 때마다 투덜대지만 피부에 느껴지는 가을바람에 살짝 울적해져, 조금은 달콤한 시럽이 들어간 음료로 마음을 달래고 싶다. 그래서 초콜릿 시럽을 넣어볼까 한다. 보드랍고 따뜻한 우유와 찐한 초콜릿 시럽을 넣은 커피. “카페모카 톨 사이즈 한 잔 주세요.”


 야무지게 생긴 아르바이트생이 음료 종류와 사이즈의 정보를 포스기에 입력한다. 그리고 상냥하게 질문한다. “일회용 컵에 드릴게요. 휘핑크림 얹어 드릴까요?” 자신의 혀를 적실 카페모카를 상상하다가 상대방의 목소리에 그만 고민에 빠진다. ‘여’ 또는 ‘부’만 선택하면 되는 일인 것을. 아르바이트생과 고객의 간격에는 정적이 휘몰아친다.


 데운 우유와 초콜릿 시럽, 에스프레소 샷을 넣은 음료는 대략 250-300kcal 남짓 되리라 예상한다. 음식을 먹기 전 칼로리를 계산하여 과식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먹고 난 후 뒤늦게 가늠하여 후회의 구렁텅이에 허우적대는 일에는 이골이 나 있다. 때문에 자주 먹는 음식의 칼로리를 대략적으로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저것.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물어본 그것. 감히 입에 올리기만 해도 살이 찔 것 같은 이것. 휘핑크림의 칼로리는 음료의 칼로리 계산을 무색하게 한다. 점심을 두 번 먹었다고 봐야 하나, 저녁을 미리 먹었다고 봐야 하나. 입에 넣고 음미하라고 존재하는 휘핑크림인데, 먹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적어도 ‘다이어터’라면 일말의 양심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휘핑크림이란 것은 얼마나 보드랍고 달콤한가. 달콤한 음료나 브레드 위에 숨결처럼 살포시 올린 순백의 크림. 애매한 모양으로 똬리를 틀어 올려줘도 사람들은 휘핑크림을 ‘그것’으로  헷갈려하거나 연상하지 않는다. 그저 너무나도 맛있게, 빵에 찍어 먹거나 음료와 함께 곁들여 마신다. 휘핑크림은 과연 그런 힘을 가진다. 다이어터에게 흉기처럼 두려워하라는 의미에서 칼로리의 단위는 kcal인 것일까. 깡패 같은 ‘kcal'을 수없이 숨기고 있는 휘핑크림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아르바이트생이 시간 끈다고 심통이 나 소중한 휘핑크림을 임의로 빼버리기 전에 신속하게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휘핑크림의 유혹에 KO패 했다고.


“네, 주세요, 조금만...”


 비루한 목소리다. 그래, 먹고 이건 아니다 싶으면 남기면 되는 것이다. 다이어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려운 선택의 끝에는 길지 않은 기다림만이 남았다.     



 음료를 찾아가라는 진동이 울리고 카운터로 가서 주문한 카페모카를 받아보니 이게 웬걸. 야무져서 얄미운 아르바이트생은 다이어터의 비루한 모습을 알아본 것 같다. 음료의 정 가운데에 찔끔, 정말이지 똥 모양처럼 찔끔 싸지르고는 이거나 먹으라고 준 것이다. 울며 겨자 먹는 고객의 ‘조금만’을 곧이곧대로 들은 것이다. 부아가 치민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이 휘핑크림을 얹을지 말지 고민했다는 것은 휘핑크림을 좋아한다는 것 아닌가? 그럼 ‘조금만‘ 먹겠다는 것을 고객이 선택하게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심기가 불편해진 다이어터는 자신이 내뱉은 ’조금만‘을 후회하며 커피 스틱으로 휘핑크림을 폭 떠서 입안에 넣었다.     


 야무진 아르바이트생은 이렇게 쫀쫀한 휘핑크림을 생성하기 위해 그렇게나 휘핑기를 휘둘렀나 보다. 휘핑크림은 혀 위에 오르자마자 달콤하게 녹아 흩어진다. 음료를 만들 때 휘핑크림 위에 드리즐한 시럽의 일부가 함께 입 안에 녹으면서 달콤한 맛을 더 진하게 해준다. 바게트 빵이 문득 생각난다. 어느 날엔가 바게트 빵에 생크림을 마음껏 발라먹은 적이 있다. 언제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꽤 오래 전인 듯하다. 오랜만에 빵집에 들러야 하나, 뇌에서 이제 그만 멈추라고 경보가 울린다.     


 일회용 컵의 바닥이 보이는 것을 보니 한숨이 폭 나온다. 오늘도 이렇게 해치운 것이다. 예전에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단골고객 중에 유독 휘핑크림을 좋아한다며 빵이나 음료 위에 휘핑크림을 많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날씬하고 발랄한 여자였던 것 같은데, 바쁠 때마다 귀찮게 스페셜 오더를 한다며 투덜대며 휘핑기에서 휘핑크림을 짜냈다. “오늘 먹은 것 다 눈두덩이 살로 가라”고 저주를 퍼부으면서 말이다. 


 달콤한 죄책감에 젖어 카페로 들어오기 전보다 더 싱숭생숭 해진 마음을 애써 이성으로 달래며 카페를 나선다. 음, 눈두덩이 쪽이 둔하게 붓는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 나만의 착각일 것이다. 내일은 조금만 먹어야지, 여자의 다이어트는 평생 따라다니는 거라고. 반복되는 다짐은 끝날 줄을 모르는 듯하다.


  맛있는 먹거리는 세상에 넘쳐 납니다. 내 주머니에 그것들을 사먹을 수 있는 돈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녀석이 항상 나타나 머뭇거림을 선사하곤 합니다. 선택을 해야겠지요. 혀와 뇌에 자극을 선물하여 이 몇 분간의 즐거움을 제공하고 어찌됐건 붙게 될 살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할 것이냐, 인내를 통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쥘 것이냐. 인생은 선택의 연속 같습니다. 예쁘고 멋있고 날씬한 몸을 갖고 싶은 욕구는 아마 아름다운 것에 끌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디어에서는 항상 소위 잘 나가는 애들이 나와 익숙한 기준을 만들어 놓고, 나 역시 그 기준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의무감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자’란 외침이 공허하게 들릴 정도로 우리는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이어트가 인생의 과업이 되어버린 지금 시점에서 어떤 선택이 나에게 있어 옳은 것일지 저 역시 항상 고민합니다.
- youtoo -

 괜찮아요. 오늘의 휘핑크림을 오늘 저녁의 밥 공기와 맞바꾸면 되니까요. 저녁 식사를 많이 하셨다구요? 괜찮아요. 오늘의 저녁식사와 내일 점심의 칼로리를 맞바꾸면 되니까요. 내일 점심을 많이 드실거라구요? 괜찮아요…….
 괜찮은…거 맞죠…? 이러다가 56세 정도 되면 영원히 한 끼도 못 먹는 것은 아니겠죠? 스트레스만 더 쌓이네요. “여기 카라멜라떼에 휘핑크림 많이요.” 다이어트 생각으로도 이미 die.
- 리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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