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갑지 못한 모녀의 소통 방식
엄마는 가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사거나 만들어 밥상에 낼 때가 있다. 다른 가족들이 좋아하는지의 여부는 상관없이 말이다. 보통 채소류, 해산물로 만든 반찬이 그렇다. 나와 아빠는 고기를 좋아한다. 엄마도 사람이니까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먹는 거야 그럴 수 있지만, 밥상을 가득 메운 풀들의 향연을 볼 때면 심통이 퉁퉁 나곤 했다.
손으로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온갖 짜증으로 타인과 스스로를 괴롭히던 시절. 학교에 급식 시설이 없었던 탓에 점심, 저녁 두 끼를 도시락을 싸들고 다녀야 했다. 어느 날에는 엄마가 가지를 메인으로 하여 갖은 채소와 양념을 곁들여 볶은 반찬을 도시락에 싸준 적이 있었다. 채소를 싫어하는 나는 도시락을 열자마자 사춘기의 어린 분노가 폭발했다. 그래서 함께 도시락을 까먹는 친구들에게 가지 볶음에는 손도 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풀이 죽은 가지에 붙어 있는 깨알 하나의 위치도 바뀌지 않은 반찬 통 그대로 집에 가져가서 엄마가 설거지를 할 때 개수대 옆에 놓는 거다. 그것이 당시 ‘이제 다 컸다’고 생각하는 인격체의 소심한 반항이었다.
엄마의 반응은 당연히 좋을 리 없다. “저 눔의 계집애가 배가 불렀어, 아주 그냥.” 하며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면 나는 또 울컥하는 마음에 바락바락 대드는 것이다. “아, 왜! 가지볶음 싫어하는 거 알잖아. 죽어서 퉁퉁 불은 지렁이 같이 생겼어. 엄마나 먹어, 그런 거!”, “이 계집애, 먹을 것에다가 불은 지렁이가 뭐야?” 그리고 짧은 시간 동안 격렬하게 튀었던 불꽃은 이제 다 키워서 ‘남산만 한’ 덩치의 딸에게 냉정하게 날리는 엄마의 등짝 스매싱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모녀처럼 살았다.
다음 날 입이 댓 발 나온 채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쌀쌀맞게 잡아 채 학교에 나선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못난 딸내미는 도시락을 열어 보고 반찬 통을 알차게 채운 계란말이를 보고 이내 도도하고도 흐뭇한 표정으로 점심 식사를 시작한다. 참고로 엄마가 소금간만 한 계란말이는 해준 적이 없다. 계란말이는 자고로 아무것도 넣지 않고 간간하게 소금간만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파도 넣고 당근도 넣고, 새우젓을 넣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넣지 않은 순수한(!) 계란말이가 가장 맛있다. 얼마나 보들보들하고 색깔도 예쁜지. 반찬 통 안에 얌전히 누워 있는 청순한 계란말이를 내려다보며 엄마가 가지볶음을 싼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나 보다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계란말이 한 덩이를 베어 무는 순간, 머릿속에서 뇌에 들어갈 크기로 몸이 작아진 엄마가 혀를 내밀고 약 올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청순한 계란말이는커녕, 계란말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청양고추였다. 1차전에서는 등짝 스매싱의 매운 맛을 보았는데, 2차전에선 청양고추의 매운 맛을 보며 녹다운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그런 말을 만든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면 우리 엄마와 삼자 대면시켜주고 싶었다.
머리가 커지기 때문에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는 나이가 되고, 그래서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는 것을 깨닫는 나날들이 계속되면서,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즐겁다. 누굴 닮은 건지 서로에게 살갑지 못한 모녀는 실의 양쪽 끝에 매단 종이컵으로 대화한 것이 아니라 도시락 반찬을 통해 투덕거리며 나름의 소통을 한 것이다. 부딪히고 깨지며 조금씩 커가는 딸을 다정하게 다독일 수 없었던 엄마는 손맛이 담긴 투박한 도시락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딸도 좋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내리사랑의 한 단면이었을까. 사춘기라는 삶의 한 과정을 거치면서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를 견고하게 엮어준 하나의 매개체가 그 당시에는 도시락 반찬이었나 싶다. 지금도 엄마와는 다정하다기 보단 장난스럽고 가벼운 이야기가 오간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말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엄마의 성의를 무시하고 도시락을 그대로 남겨간다거나, 먹을 것에 이상한 비유를 하며 비난한 것은 나에게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가지볶음= 죽어서 퉁퉁 불은 지렁이’라는 것이 적확하고 마음에 와 닿는 비유가 아니었다면 엄마가 내 등을 그리 세게 후려치진 않았을 것이다. 요즘도 가끔 엄마가 당시의 이야기를 하며 나를 흘겨본다. “저 놈의 계집애가 가지볶음을 가지고 지렁이 같다고 했지” 하면서. 10년 가까이 지난 후에도 기억에 남을 만큼 탁월한 비유였던 것이다.
얼마 전 가지를 불에 구워 먹어야 영양 흡수율을 최대로 높일 수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아침 밥상에서 지나가는 말로, “엄마, 가지는 볶아먹지 말고 구워 먹어야 한대”라고 귀띔을 하자 엄마는 분명 내 말을 들었을 텐데도 이렇다 할 대답이 없다. 그런 말을 하는 나도 엄마가 가지를 구워 주지 않을 것을 안다. 가지볶음을 식기에 덜어내면서 “먹기 싫으면 먹지 마. 계집애야.”라고 할 것이다. 나 또한 가지볶음에는 입에도 대지 않을 테고. 언젠가 나의 주방을 갖게 된다면, 나는 가지를 불에 구워서 먹을 거다. 스테이크와 곁들이면서 말이다.
영양이냐, 맛이냐에 대한 첨예한 대립. 누구나 경험했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에게 식량을 제공해 주시는 부모님과의 대립은 더 더욱이. 특히나 이유식을 떼고 나 사람 구실을 하게 된 이후부터 점점 세상의 맛난 음식들을 인지하고 난 이후의 학생 시절이라면 납득이 되지 않겠지요. ‘세상에 맛난 음식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시커먼 지렁이를 먹으라고 하느냐!’
그것이 비록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영양분을 섭취하는 지혜일 지언 정, 이미 자극에 길들여진 미각은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겁니다. 왜 맛있는 음식들은 건강과는 거리가 먼 쪽이 많을까요. 그리고 살짝 보인 도시락을 친구들과 같이 먹던 친근한 풍경. 아마 이제는 영화,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 같아 보입니다. 맛난 반찬을 빼앗아 먹는 일진 무리들을 피해 도시락 정예 멤버들만 모여 학교 뒤 주차장에 숨어서 먹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반찬은 그렇다 쳐도 밥까지 퍼 가져가는 녀석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거지 같은 새끼들...) 부모님들은 은연중에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 없다’라고 하는 항목을 생활 속에서 가르쳐주고 싶으셨음이 아닐까 조심스레 예측해 봅니다.(부모가 되어보지 않고선 알 수 없음에.)
- youtoo -
어쩐지 ‘마마’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엄마라는 말보다 더 엄마 같은 단어. 저 역시 아부지와 친구 같은 관계로 자라 온 터라 몽글거리는 미소를 띠고(그 얼굴의 풀-버전을 상상하지는 말아주시길) 읽었습니다. 물론 모녀관계와 부자관계의 근본적인 차이는 분명 있습니다만, 그때의 그 내리사랑. 버무려진 명란젓만 보면 화를 내던 어린 시절의 제가 떠오릅니다. ‘맛있는 것’보다는 ‘몸에 좋은 것’을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기에는 자식은 언제나 너무 어린 법이죠. 근데 당연하잖아요? 자식이니까 어려야지 뭐. 자식의 당연한 권리로 불어 터진 지렁이를 거부하는 게 또 ‘부모’가 느끼는 재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먼 훗날 제가 부모가 되었을 때, 그런 날이 올까 싶습니다만, 제 자식이 제가 오래간만에 해 준 요리를 보며 거부한다면. 그건 좀 열 받을 것 같긴 합니다. 감히 남겨? 넌 굶어 이제. haha, no mercy.
- 리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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