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네시 Jun 26. 2016

아직, 스물아홉

626의 연어 한 마리

직장을 떠나자. 2.5년. 결심하고, 고민하고, 묻고, 울고, 털다가 다시 집어든 그 결심. 목적 달성을 위한 첫 관문은 영어점수였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온 덕에 그 흔한 영어점수는 YBM을 탈탈 털어도 흔적이 없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그래도 제일 만만한 녀석을 집어들었다. (점수는 전혀 만만하지 않지만) 난 미처 알지 못했던 대학 시절 숨은 취미가 '토익 책 수집' 이었나. 출판사 불문, 레벨 불문, 심지어 출판연도만 다른 같은 이름의 문제집까지- 이렇게 전공 공부를 했으면 난 이미 철학왕일텐데.


토익, 아니 심지어는 한달 전쯤 개정된 '신토익'이라는 녀석과 주먹다짐 좀 해보겠다며 집을 나섰다. 덜컹거리는 중학교 걸상에 앉아서 사람구경- 문제구경-. 설문지 마킹 칸의 직업상태란에는 왜 '실직 계획 중'이 없을까- YBM과 협상 좀 하면, 대한민국 청년 구직난과 실업 이유 파악이 훨씬 쉬울텐데 -  따위를 고민하다보니 두 시간이 금세다. 졸린 눈을 비비며 교실 문을 나섰다. 월요일 등교를 불평하던 7학년의 내가 잠깐 눈가에 머물렀다.


동기들을 만났다. 이것도 아마 반년이 조금 넘었다. 벌써 십 년. 시간이 빠르단 얘기도 이젠 부끄럽다. 회사의 이상한 선임 얘기, 결혼 준비로 오가는 스트레스 풀이, 어디서 주워들은- 하지만 이젠 남얘기라 하기도 어색한- 육아얘기.


- 직장을 떠날거야.


후련할 줄 알았던 선언이 앞선 주제들에 잔뜩 풀이 죽어 고개만 살짝 들이민다. 너라도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살라는 격려 뒤에 "그럼 뭐 먹고 살게?" 란 질문이 어김없이 꼬리를 물었다.  


 - 여행


몇 초의 당황이 깃든 쉼표 뒤에 따라오는 2차 격려. "그래!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사는게 제일이지."

  

하고 싶은걸 하면서 살 수 있었던 나날이 있었던가. 직접 채운 '나'를 위한 족쇄는 항상 발목을 잡았다. 'ㅇㅇ딸, ㅇㅇ언니, ㅇㅇ친구, ㅇㅇ애인'  


발목을 잡아도 행복했던, 지독히도 아름다운 삶이 어렵고 더러운 삶으로 변하는데 2년은 차고 넘쳤다. 하고 싶다-가 해야만 한다-로 바뀌는데도 과분한 2년이었다.


- 넌 누굴 위해 살아?


눈 앞에 대기중인 퀘스트가 깨지면 줄줄이 새 칭호가 하사될거다. 'ㅇㅇ엄마, ㅇㅇ부인, ㅇㅇ며느리'

자꾸 들이치는 새로운 수식어 앞에서, 날 지켜내지 못하면 스스로 전부 다 망가뜨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결국 수식어는 거품이라, 본진을 지켜내지 못하면 다같이 무너져버릴테니. 지금 발동한 모든 방어기제는 전부를 지키려는 몸부림이 아닐까(라고 변명을 한가득).


*


결국 오늘도 연어를 먹었다. 사람도, 장소도 바뀌는데 연어는 그대로다. (맛은 다르지만)

횟집이든, 이자카야든, 전문점이든, 무한리필집이든


스물아홉 일요일엔

아직

출근준비중이라며.




 

매거진의 이전글 스물아홉생일, 사표를 결심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