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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베리 Sep 11. 2015

오후 두 시

세상이 멈추다


"가족관계 증명서 떼어오셔야 처리 가능합니다"


빨간 반팔티를 입은 S통신사 대리점 직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말끝을 흐리거나 내가 애걸복걸하면 한 번 쯤은 눈감아 줄 수 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도록 얘기했다면 난 팔을 붙잡고 마구 흔들며 건강보험증으로 대신해달라고 졸랐을 것이었다. 


"... 근처에 서류 뗄 수 있는 곳이 있나요?"

"여기 근처에 동사무소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형! 동민이 형! 동사무소 어디지?"


동민이  형이라는 사람은 작업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나에게 달려와 손가락으로 문 밖을 가리켜 가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자 하니 많이 멀지는 않아 보였으나 가뜩이나 이렇게 더운 여름 날씨에 차비도 아끼고 건강도 챙길겸 20분을 걸어온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가족할인이 뭐라고 이렇게 날 고생시킨단 말인가. 난 서류 떼서 온다는 말을 남긴 채 문 밖을 나섰다.


대리점을 나와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서서 스마트폰으로 동사무소를 검색했다. 동민이  형이라는 사람을 못 믿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뜨거운 태양 아래 내가 서 있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대충 위치를 파악하고 고개를 들어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하였다. 보행자 신호등의 불이 꺼져 있었을 뿐 아니라 운전자 신호등은 주황색이 깜빡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죽은 듯 고요함과 적막함이 내게 밀려 들었다. 꽤나 큰 사거리에 모여있는 차들은 저마다 숨죽이며 제자리에서 자기들의 자리를 지킬 뿐 이었다. 그때만 해도 난 사람들이  나처럼 이런 상황이 왜 벌어지는 건지 의문을 품은 표정이 아닌 당연하다는 눈빛으로 서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파란색 경찰복을 입은 50대 중년층 남자와 오랜만에 외출을 한 듯 한 껏 치장을 한 젊은 여자와의 대화를 듣기 전 까지는 말이다.


"..... 그럼 2시 20분까지 기다려야 해요?"

"네"


무의식적으로 내 왼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바라본다. 시각은 이제 오후 두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이제야 내 눈에  한두 명씩의 경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어 경찰복을 입었으나 경찰로는 보이지 않는 아까 그 중년층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왜 차들이 정지하고 있는 거예요?"

"민방공 훈련 중이에요"


민방공 훈련. 휴대폰을 집어 들어 검색 포털사이트에 민방공 훈련을 검색하기 시작한다. 하나 둘 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뉴스 기사들. 


[8월 19일 14시 민방공 대피훈련 실시 14:00~14:20... ]

[민방위기본법 제25조 및 동법 시행령 제34조에 의거 오는 8월 19일(수)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해본 민방위 훈련이었다.  동사무소를 가기 위해 이 뜨거운 햇볕 아래 20분이나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하여 짜증이 밀려올 법도 했지만 이런 순간이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영상이 일시 정지된 듯 한 세상이 멈춘 듯한 적막함을 느껴볼까 싶어 그 고요함 속에 가만히 나를 흡수시키기로 한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멍 하니 차창밖을 내다보고 있거나 자신들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문득 내가 지금 택시 안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한다.

갑자기 저 멀리서 움직임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을 향하였고 그 곳엔 분홍색 민소매 티셔츠와 나풀거리는 치마를 입고 마치 누군가에게 죄를 지은 듯 한 표정의 30대 후반 여성이 있다. 나의 시선도 함께 횡단보도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빠르게 이동한다. 20분도 지체할 수 없는 급한 일이 있나 보다. 어쩌면 화장실이 급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유리잔이 부서지 듯 이 적막함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로 깨어진다. 신호등의 불이 하나 둘 켜지고 네거리에 정차한 차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신호를 받아 이동한다. 마트에서 한 가득 장을 봐왔는지 무거워서 내려 놓았던  'xx마트'라고 쓰인 봉투를 양손 한 가득 씩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다. 나 또한 그들 틈에 섞여 동사무소로 발길을 옮긴다.  세상이 죽었다 깨어난 듯 다시 활기를 되찾는 순간이었다. 사이렌은 위대하다. 


다음날 팀장님 차를 타고 같이 퇴근하던 중 네거리에서 차가 신호대기 중 이었다.

-아 팀장님 어제 저 여기서 민방공 훈련 때문에 20분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니까요

-좋은 경험이야. 살면서 한 번도 겪지 못 할 수도 있어.


맞다. 난 소중한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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