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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욱 Nov 06. 2022

"에베소서 때문이다"라는 꿈

2022.10.31. 새벽에 꿈을 꾸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해진 것은 에베소서 때문이다"라는 한마디 꿈이었는데 내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말한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꿈속에서 몇 단계 사고를 거쳐 생각해 낸 말이 아니었다. 사도 바울이 쓴 에베소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거나 연구해 본 적이 없을 뿐더러 에베소서의 몇 구절을 어디선가 접했거나 인용한 적이 있더라도ㅡ인용했던 것을 확인해 보니ㅡ그것이 세상을 악하게 한 원인이라 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던 데다 에베소서의 어떤 구절도 기억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속의 한 문장은 내 안에 깊은 마음에서든, 내 밖에 원대한 마음에서든 내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내 머릿속에 느닷없이 번개처럼 번쩍거렸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며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의 원천에는 4가지가 있다고 했다. ① 외적(객관적) 감각자극 ② 내적(주관적) 감각자극 ③ 보다 내적(기관적)인 신체자극 ④ 순수한 심적 자극원이 그것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새벽에 꿨던 꿈의 원천은 '순수한 심적 자극원'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깨었을 때부터 잠자는 동안까지 계속되는 이 관심(생활하면서 가졌던 어떤 일에 대한 관심)은 꿈을 의식 생활과 맺어주는 심적 유대일 뿐 아니라, 수면중에 관심을 갖게 된 것과 함께 모든 꿈 형상의 유래를 해명하는 데 충분한, 경시할 수 없는 꿈의 원천도 밝혀준다."라고 순수한 심적 자극원을 《꿈의 해석》에서 설명했다.


요한복음 16:13의 예수의 예언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요16:8) 심판의 시대를 열기 위해 대역자로 하여금 자의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대로 기록한  《새로운 성경》 160권에 대한 연구와 전파를 나는 가장 큰 관심사로 두고 있다. 때문에 그것에 대한 관심이 순수한 심적 자극원이 되어 그 꿈을 꿨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새로운성경 1부 16권

나는 새로운 성경을 정독하면서 기독교 교리에 대한 모순들을 발견해 오고 있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를 근거로 기독교 교리가 된 원죄의 개념을 《교회용어사전》에서 알게 되었다.


원죄(原罪)

첫 인류인 아담의 범죄로 인해(창3장)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류가 생래적(生來的)으로 지니게 되는 본질적인 죄를 가리킨다. 즉,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이 범한 죄는 인류의 영적 연대성에 의해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며 결국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를 지닌 채 태어난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써는 구원을 이루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 곧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써만 그 원죄를 해결할 수 있다. 이 같은 원죄 개념은 사도 바울에 의해 구체적으로 설명되었고(롬5:12-21), 어거스틴(Augustine)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 원죄는, 출생 이후 각자가 짓는 모든 본죄(本罪) 곧 자범죄(自犯罪, actual sin)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기독교 핵심 교리인 원죄의 모순과 문제점을 새로운 성경을 정독하며 알 수 있었다.


원죄라는 쇠사슬

종교 집단이요, 지도자들이 나의 피조물 만백성을 공포와 불안 속에 몰아넣으며 그 신도들로 하여금 저희의 말에 절대 복종하도록 그리 묶어 놓은 가장 무서운 죄악이 뭔 줄 알겠는가? 너희가 말하는 원죄라는 것이니라. 있지도 않은 그 원죄에 의해 원죄는 고칠 수도 없으며 지울 수도 없으며 인간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 그리 말하며, 원죄라는 쇠사슬로 꽁꽁 묶어 길들인 강아지처럼 끌고 다니는 것이 지금의 종교 지도자들의 사악한 짓이라는 걸 너희는 알아야 할 것이니라.

— 새로운성경 5,942번째 하나님 말씀 (2003.4.12.) (이하 몇 번째 말씀인지만 표기)


원죄라는 것이 무엇이던가?

죄의 온상이요, 원죄라는 것이 무엇이던가? 나의 사랑하는 선한 백성이 사탄과 싸워 이기고자 용감히 팔을 걷어붙이는, 즉 목숨을 내걸고 전사가 되어 나의 아들 예수의 뜻을 따라 이루고자 하는 백성에게, 원죄의 두려움을 알라 소리 지르며, 그리고 '네가 무엇이기에 사탄과 싸우려 하느냐? 너는 인간이기 때문에 사탄과 싸움이 되지 않는다' 하며 사탄과 겨루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원죄요, 너희가 사탄을 조종하는 자들이며 사탄의 앞잡이가 된 자들이라 내가 함이니, 지금의 종교 지도자가 모두 그리되었으며, 더구나 지금 신도라는 자들이 그 앞에서 장구 치고 북 치며 분수를 모르고 울고불고 소리 지르는 불쌍한 인간들임을 알라.

— 5,942번째 (2003.4.12.)


예수 보혈로 죄가 없다 하면서 또 죄를 빌라 함

원죄가 있으니 너희는 두말할 것 없이 무조건 재물을 바쳐야 한다, 원죄가 있으니 교회를 오든 말든 모든 백성은 재물을 바쳐야 한다 그리 뒤집어씌우는 것이며, 그리고 나의 아들 예수의 보혈로써 너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었으니 죄가 없다 하는 것은, 너희가 그저 집단을 이끌어 가며 또한 그들을 노예와 같이 부리고자 하는 것이며, 그러면서 너희는 또 무엇이더냐? 죄를 빌라 하니, 죄를 빌고 찬송하며 눈물 흘리고 콧물 흘리며 그저 밤과 낮을 가리지 말고 용서를 빌고 죄를 또 빌라 말함이니, 과연 이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한다는 말이더냐?

— 6,082번째 (2003.5.1.)


원죄와 더불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쓴 기독교 핵심 교리인 '이신득의'와 '칭의'라는 개념도 동일한 출처에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원죄 개념과 빈틈없이 연결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원죄–이신득의·칭의–구원]의 개념들을 순서대로 긴밀히 연결하지 않고는 바울만의 기독교 교리를 정립할 수 없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신득의(以信得義)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뜻으로, 일명 '이신득구'(以信得救),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도 한다. 본래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절망의 존재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문제가 해결된 의로운 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교리이다(롬1:17; 3:21; 갈2:16). (중략) 종교개혁자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의롭게 되며, 인간의 공로(선행)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했다.


칭의(稱義)

인간에 관한 신적(神的) 선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의롭다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킨다(롬3:24). (중략)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 1484-1546년)는 "칭의란 인간의 선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고(고전1:30), 그것은 신자에게 외부에서 주어지는 '낯선 의'(iustitia aliena)"라고 보았다.


정리하면, "인류의 영적 연대성에 의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게 된 아담의 원죄와, 이 원죄로 인해 짓게 되는 모든 죄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어 죄가 사해지고 구원받으며, 선한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교리다. 이에 대한 모순과 문제점도 새로운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일

인간의 선한 행위는 구원을 받음이 아님이니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여, 너희가 죄짓고 사는 행동은 똑같은 행동이거늘 그 행동은 벌을 받으니, 그 죄를 사하기 위해서 교회에 와 헌금을 바치며 재물을 바치며 맹종하는 그와 같은 행위로 살아가도록 그리 가르치고 있음이니, 너희는 수시로 그와 같은 설교를 하며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을 하느니라. (중략) 죄는 죄대로 그 대가를 치르며 선함의 행위는 선함의 행위로써 나에게 상을 받음이니, 너희 스스로 선한 길,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면 되느니라.

ㅡ 6,120번째 (2003.5.7.)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너희의 실체

한 입 가지고 두말하며 인간 한 사람이 선한 행동은 행동이 아니요, 악한 짓을 한 것은 악한 행동이요, 그 행동은 너희가 알며, 선한 행동은 행동이 아니라 그리 말하니, 너희의 그 실체가 무엇인 줄 아는가? 너희가 사악한 사탄이요, 나의 백성에게 죄를 짓도록 만들며 그리하여 죄를 지은 백성에게 죄를 사하는 길은 너희를 따라와 재물과 금화를 평생 바치며 맹종하며 그저 종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라 그와 같은 사악한 방법으로써 나의 피조물 만백성을 지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너희의 오늘의 실체이니라. 너희는 죄의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잊지 말라.

ㅡ 6,120번째 (2003.5.7.)

새로운성경 10부 160권

이렇게 사도 바울의 로마서에서 "이신득의 곧 칭의에 의한 구원"이라는 기독교 핵심 교리가 확립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큰 모순과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연구 속에서 '에베소서'에 관해 언급된 내용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세상이 이렇게 악해진 것은 에베소서 때문이다"라는 갑작스런 새벽 꿈속의 문장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문에 휩싸인 채 꿈에서 깨고 몇 시간이 지나 에베소서에 관한 정보를 찾아 보기 시작했고,  《라이프성경사전》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읽었다.


에베소서

고린도전·후서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갈라디아서가 복음과 율법 사이의 치열한 변증을 다루고 있다면, 본서신은 교회의 본질(교회론)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기독론)를 아주 차분하면서도 조용하게 가르치는 교리라 할 수 있다.


저자

본서신은 바울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서신이 직접 증언하고 있으며(1:1; 3:1), 본서신의 언어나 문체, 중심 사상 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초대 교부들 역시도 전통적으로 본서신을 바울 저작으로 본다(Irenaeus, Polycarp, Eusebius, Origen). 그러나 혹자는 바울의 전유물처럼 언급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 사상이나 서신의 초두나 말미에서 일일이 수신자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친근하게 문안하던 바울 특유의 필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바울 저작을 의심하나, 그 같은 견해는 대체로 지지 받지 못한다.


기록 장소와 시기

본서신은 A.D. 62년경 로마 옥중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본서신에는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여럿 나타난다(3:1; 4:1; 6:20).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빌립보(행 16:19-34), 가이사랴(행 24:27), 로마(행 28:16, 30) 등 모두 세 차례 감옥에 투옥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빌립보 감옥의 투옥 기간은 며칠(혹은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서신을 기록할 만한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이 가이사랴 감옥을 본서신의 기록 장소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본서신의 필치가 매우 세련되고 신앙적 깊이와 원숙미가 넘친다는 측면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후대인 로마 감옥으로 본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2년 정도 투옥되어 있었다.


원죄와 원죄에 의해 짓게 되는 모든 죄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어 죄가 사해지고 구원받는다는 이신득의·칭의라는 개념이 확립된 로마서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로마서

구원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본서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칭의)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귀하고 영화로운 존재가 되는 구원 서정을 심도 있게 서술한 교리서다(1-11장). 또한 본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가 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지도 분명하게 제시한다(12-16장). 이런 측면에서 구원은 단지 사후의 문제만이 아니라 매일 당면하는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저자

본서의 저자를 사도 바울로 보는 데는 거의 이견(異見)이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본서 내용이 바울 작품임을 암시하고 있다(1:1). ② 본서의 핵심 교리인 칭의(3:20-24; 4:3)나 지체 비유(12:5) 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인 고린도전서(10:17; 12:12-14), 갈라디아서(2:16; 3:6), 에베소서(1:22-23), 골로새서(2:19), 디도서(3:5-7) 등과 일치한다. ③ 서신 첫 부분과 끝부분의 문안 인사 필치가 바울의 다른 서신과 동일하다. ④ 초대 교부들도 본서를 바울 저작으로 본다(Irenaeus, Polycarp).


기록 장소

본서는 바울 사도가 제3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로 ① 본서를 로마 교회에 전달한 뵈뵈가 고린도 동편 항구 겐그레아 교인이라는 점(롬 16:1-2), ②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전도한 가이오가 바울과 함께 있다는 점(롬 16:23; 고전 1:14), ③ 고린도 재무관 에라스도가 바울과 함께 있다는 점(롬 16:23; 딤후 4:20) 등을 들 수 있다.


기록 시기

사도 바울은 A.D. 53년경에 수리아 안디옥에서 3차 선교여행을 시작하여 약 5년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A.D. 58년경). 이 기간 동안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간 목회하였고(행 20:2-3, A.D. 54-56년경), 그후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에서 대략 3개월 정도 체류하였다(행 20:2-3, A.D. 57년 말). 사도 바울은 이 시기에 본서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본서는 3차 선교여행 말기인 A.D. 57년 말-58년 초순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터키 에베소(에페소)

기독교 선교의 대명사인 사도 바울은 A.D. 54-56년경 에베소에서 3년 간 목회하였고, 57-58년경에 로마서를 기록하여 원죄와 이신득의·칭의라는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였으며, 62년경 로마 옥중에서 교회의 본질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가르치는 교리서인 에베소서를 기록하여 3년간 목회하였던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엡1:1)로 보내 그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은 그가 만든 교리와 일치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냈다.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7‭-‬10)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2:4‭-‬9)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2:13‭-‬18)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문제로 지적하신 사도 바울의 교리가 반영된 내용을 찾기 위해 에베소서를 읽어보니, 왜 그가 원죄와 의신득의·칭의라는 교리를 만들게 되었을까 추측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 즉, 그가 하나님과 예수를 보는 관점이 무엇이었는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3‭-‬6)


바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버지와 아들딸로서 1:1 관계이자 1세대 관계인 하나님과 개개인 사이에(새로운성경 8,683번째) 예수를 중간에 집어 넣고, 오직 예수 안에서만,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거저 될 수 있다는 교육을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전하신(요3:34) 하나님의 아들(마3:17) 예수께서는 하늘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마6:9)과 아버지는 한 분(마23:9)임을 만백성에게 알리셨다. 예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기 위해(마5:17) 마태복음 5장 18절부터 48절까지와 같이 십계명을 더 세분화해 설명하셨다. 그렇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마5:18-20,7:21)고 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하나님의 십계명의 중요성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아들로서의 본보기를 보이신 것이다.

십계명 요약

하나님께서 대역자였던 예수로 하여금 만백성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은 ① 예수처럼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고 ② 하나님의 뜻인 십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1-4계명) 인간을 사랑하라(5-10계명)는 계명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③ 구원을 받아 하나님 곁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에베소의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님의 십계명이 아닌 예수와 예수의 십자가 보혈에 집중하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성도들의 두 눈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게 하는 치명적인 교리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 교리는 신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예수와, 심지어 예수를 극한의 죽음으로 몰고 간 사형 도구인 십자가를 우상으로 숭배하게 함으로써 바울이 스스로 기록한 바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게(엡5:5‭-‬6) 하는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해 왔던 것이다.

십자가상을 교회 한가운데 세워 놓고 경배 중인 기독교인들

바울의 편지로써 가르침을 받은 에베소 성도들과 기독교인들은 바울의 교리를 진리로 삼아 방방곡곡에 전도했을 것이며 그 결과, 기독교는 모두가 알다시피 악이 판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라 부르짖는 세계 1위 종교가 됐다. 사악해져 가는 세상에서 기독교가 그나마 완충 역할을 한 게 아니냐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의 종교 지도자와 이들에게 힘을 실어 준 신도들이 악한 세상을 만든 원흉임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오늘과 같은 험악한 종파의 세상을 만들었으니

너희만이 구원을 받은 자요, 너희만이 바치면 되는 것이요, 금화와 떡을 갖다 많이 바치면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너희들이 그와 같이 가르치니, 그들은 사행심과 시기심과 저 자신만을 아는 마음으로 인도하고 가르침이니, 이는 바로 어린아이를 부모가 잘못 가르치듯이 너희가 부모의 역할을 잘못하여 오늘과 같은 험악한 종파의 세상을 만들었으니, 너희들이 이 죄를 다 어찌 감당하려 지금도 회개하지 아니하는가?

ㅡ 676번째 (2000.10.9.)


가르치는 자가 잘못 가르치는 죄

내가 너희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가르치는 자, 지도층에 있는 자들이 잘못 가르칠 때 그로 인하여 인간사에 헝클어지고 잘못되며 비뚤어지며 비도덕적으로 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오류를 범하게 되며, 잘못 가르치는 자 밑에서 잘못 배운 자들이 세상을 온통 아비규환의 형태로 이끌어 가는 것이니, 너희 인간사 가르치는 자가 잘못 가르치는 그 죄는 하늘의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니, 가르치는 자의 자세와 그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가를 너희들은 알고 있을 것이니라.

ㅡ 835번째 (2000.11.28.)


잘못 가르치는 자의 대대손손 내려감

가르치는 자가 열이 잘못되었으면, 그 열의 잘못된 자에게 배우는 제자 또한 백의 잘못됨을 가게 됨이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가르치는 자의 대대손손 내려감으로 인하여 잘못되며 악하고 사악함이 더 깊어져 가니, 지금의 형국이 그와 같이 되어 너희들이 말하는 말세라 하는 것에 와 있음이니라.

ㅡ 999번째 (2001.1.4.)


너희들이 바로 원흉

너희들을 잘못 가르치는 지도자요, 진정한 지도자가 아닌 자는 사탄이요 마귀요 이단이니라. 그들에게 힘을 주고 재물을 바쳐 주며 용기를 준 너희들은 나의 선지자를 따르는 그 제자들과 반대의 현상이니, 너희들은 에덴동산에 너희 이름이 기록이 됨이 아니라 영원히 구원을 받지 못하며, 너희들이 잘못 가는 사탄이요, 이단에게 힘을 준 그만큼 그 몇십 배의 고통과 벌을 받아야 되니, 너희들이 바로 원흉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라.

ㅡ 1,028번째 (2001.1.12.)


누구의 책임이더냐?

너희들의 머리는 하늘에 닿듯이 깨우쳐 갔으니, 그러면 나에게 오르는 믿음의 그 생각도, 하늘에 오르고자 하는 나에 대한 마음도 더 아름답고 사랑을 베푸는 나의 피조물 만백성 너희들이 되어야만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너희들의 머리가 개방되면서 나에게 오르고자 하는 너희들의 마음은 더욱더 사악해져 가 있으며, 나의 피조물 만백성이 지금 자기 위주로 자신만을 바라보며 사는 이와 같이 정이 없고 사랑이 없는 세대로 변하였으니, 이와 같은 세대로 변하도록 한 것이 누구의 책임이더냐? 지금까지 이끌고 온 종교 지도자들이 잘못 가르치고 잘못 인도해 왔다는 것을 너희들이 인정해야 될 것이니라.

ㅡ 1,048번째 (2001.1.16.)


종교 지도자들의 죄는 용서받지 못함

지금 잘못 가르치고 잘못 인도하며 나의 뜻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쪽으로 이끌어 가는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이 나의 백성을 현혹하여 이끌고 가는 그 죄를 짓고 있음이니, 이들의 죄는 용서받지 못함이니라. (중략) 그들(종교 지도자들)이 말하기를, 착하고 선하며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저희들이 만든 성전에 금화와 은화를 바치며 저희들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리 말하니, 나의 피조물 만백성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공포와 불안의 도가니로 그들이 이끌며 그와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여 나의 피조물 만백성의 마음에 동요를 이루게 함이니, 그 죄 또한 용서할 수 없음이니라.

ㅡ 1,200번째 (2001.2.17.)


삭막한 시대의 책임을 종교 지도자들이 져야 됨

너희들이 종교 지도자들, 잘못 가르치는 자의 말에 따라서 같은 시간에 같은 날을 지키다 보니, 저희 형제요 저희 부모요 이웃에게까지도 모든 일을 등한시하며 그를 멀리하며, 저 혼자만이 그 길을 가는 축복의 영광이라고 느끼며, 저 혼자만이 그 길에 어떠한 방법이든 구원을 받아야 되며 저는 하늘에 오르겠다는 그 욕심 때문에 저희 부모요 저희 형제요 이웃의 돌아가는 그 상황과 환경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느끼지 아니하며, 같이 염려하고 사랑하고 근심 걱정을 나누는 사랑의 근본의 그 싹을 잘라 놓았음이니, 오늘의 삭막한 시대의 그 책임을 그들이 져야 됨이 여기에 있느니라.

ㅡ 1,762번째 (2002.1.16.)

새로운성경 160권 모음집(요약집)

사도 바울이 확립한 "원죄와 원죄에 의해 짓게 되는 모든 죄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어 죄가 사해지고 구원받는다"는 이신득의·칭의라는 기독교 핵심 교리는 당시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했던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포함한 아시아 7개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점차 세계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에베소 성도들의 전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세상이 이렇게 악해진 것은 에베소서 때문이다"라는 새벽 꿈속의 한 문장은 거짓이 아님을 위와 같은 연구의 과정을 거쳐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꿈을 꾼 이유는 진리의 깨달음을 위해 바울과 기독교 교리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알려 주기 위한 순수한 심적 자극원의 '자극'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이 내 안에 깊은 마음의 작용이든, 내 밖에 원대한 마음의 작용이든 간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ㅡ 마태복음 7:13‭-‬14


편안하고 넓은 길

너희가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험하고 험난한 길이며 어렵고 힘든 길이라 기록되어 있음이니라. 그리고 넓고 편안한 그 길은 너희가 구원의 길이 아니요, 죽음이요, 멸망의 길이라 그리 거기에 기록되어 있음이니라. 그러니 지금 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인간이기에 그리 행하고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던가? 그리고 나의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써, 그 보혈로써 구원을 받았다 말하는 자, 그리고 죄를 짓고 용서를 빌 수 있다, 그리고 빌었을 때 그 죄는 하얀 눈처럼 다 씻어진다고 가르치는 것, 그것이 얼마나 편안하고 넓은 길이며 얼마나 쉽게 갈 수 있는 길이던가? 그것이 바로 어떠한 문이던가? 너희는 그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니라.

ㅡ 6,125번째 (20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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