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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별들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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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기 Sep 30. 2015

여행의 마지막, 이틀의 시간 -2

소매치기와 마약과 사람들

  나는 떼르미니 역 내 경찰서에 다시 들러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문은 활짝 열려 있는데도 경찰관은 "We are  closed"라는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 경찰서 밖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여기 있는 것보다 다른 경찰서를 찾아가는 게 빠를 것이라고 얘기한 다음, 로마 일정 내내 묵었던 호스텔로 향했다. 호스텔 직원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 안타깝다고 말했다. 같은 이탈리아 국민인 게 부끄럽다고도 했다.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 우리 호스텔엔 방이 가득 찼어. 혹시 다른 호스텔에 빈 방이 있나 물어봐 줄까?" 나는 제발 그래  주세요.라고 한국어로 말했다. 그는 몇 번의 통화를 거친 끝에 떼르미니 역 근처 싼 숙소를 알아봐주었다. 나는 그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전한 뒤에 배낭을 메고 그곳으로 향했다. 

 여권이 없는 여행객들을 쉽게 받아줄 순 없었다. 소개받은 호스텔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려는데 자꾸 무언가가 맞지 않았다. 내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국제학생증을 내밀었지만, 공식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십여 분을 그렇게 옥신각신한 끝에 나는 사정사정해서 국제학생증만으로 체크인을 했다.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침대에 눕자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진이 모두 빠져 버린 것이다. 밖으로 나가기도 싫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탈리아 로마가 너무도 싫었다. 나는 그대로 그 다음날 아침까지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방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가장 먼저 대사관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 갔는데도 대사관 안은 북새통이었다. 다들 나와 같은 동병상련의 사람들이었다. 그 안에 앉아 있으니 저절로 다들 한탄을 했다. 각양각색이었다. 여권을 도둑 맞은 사람들부터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차를 통째로 도난당한 가족까지 있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하며 잠시나마 한국이 얼마나 안전한 나라인지 느꼈다. 나는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일회용 단수여권을 재발급받을 수 있었고, 떼르미니 역에 다시 돌아와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온 신경은 곤두서 있었고, 누군가 내 옆을 지나가기만 하면 그 즉시 무섭게 노려보았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에 도착한 나는 원래 예정되어 있던 항공사에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아예 탑승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되어 새 티켓을 끊어야 했다. 나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티켓을 예매할 수 있었다. 다행히 처음 타고 온 비행기와 같은 두 번의 경유 좌석이 딱 한 개 남아 있었다. 비행기는 다음 날 출발 예정이었다. 비행기 티켓까지 끊고 난 뒤 나는 고민했다. 다시 로마 시내로 돌아가 하룻밤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안전한 공항에서 노숙을 할 것인가. 고민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로마 공항은 우리나라의 공항과 비교하면 유치장 수준이었다. 제대로 앉을 곳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로마 시내로 향했다.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다. 나는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으로 가장 싼 숙소를 찾아보았다. 한화 2만 원에 거리도 꽤 가까운 곳이 있길래 당일 예약을 신청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마치 범죄영화에 나오는 슬럼가처럼 음습했다. 사방이 둘러싸인 형태의 아파트였는데, 호스텔을 관리하는 매니저는 나를 보더니 여기서 잘 거냐고 물었고, 메모지에 주의사항을 찍찍 적은 뒤 방 열쇠를 주고 돈을 받았다. 여태껏 거쳐왔던 그런 절차들은 싹 무시한 초간단 체크인이었다. 방은 5인실이었고, 내가 들어갔을 때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괜스레 무서워졌다. 방에는 잠금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다. 방을 비우면 가방이 털릴 것이 분명하다. 나는 아무 데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내 룸메이트들은 보안 걱정은 하지 않는지 죄다 가방을 풀어헤치고 놀러 나간 것 같았다. 나는 한참을 침대에 앉아 있었다. 

 밤이 찾아오자 룸메이트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폴란드 커플 페데릭과 모니카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들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악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뒤에 도착한 러시아인 미샤도 착한 사람인 것 같았다. 나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들의 여행담을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하자 모두들 욕 섞인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에게 힘을 내라는 말을 해 주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우리는 별안간 옥상에서 차를 마실 궁리를 했다. 페데릭이 제안한 것이었다. 페데릭과 모니카, 나와 미샤는 옥상에 올라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순간, 한 쌍의 남녀가 우리 문 앞에 서 있었다. 무서웠다. 그들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술 취한 사람인 줄 알았다. "술 취한 게 아냐. 냄새가 안 나. 마약 한 사람들이 분명해." 페데릭이 말했다. 가장 먼저 방문을 열고 나선 나는 코앞에 마약 중독자가 서 있다는 사실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우리를 해치려는 것은 아니겠지? 다행히, 남녀는 서로 뒤엉키며 다른 방으로 향했다. 

 나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옥상으로 향했다. 그곳엔 앳된 여자아이 둘이 있었다. 큰 아이는 대략 13살, 작은 아이는 끽해야 7살 되었을까 싶은, 너무도  어린아이들이었다. 큰 아이는 시종일관 지치고 우울한 얼굴이었고, 작은 아이는 즐겁게 장난을 치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다정한 모니카는 이탈리아어를 조금 할 줄 알았기에, 아이들과 놀아주기 시작했다. 남은 남자 셋은 정치 얘기나 군대 얘기 같은 것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 후, 모니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이유를 듣자 우리는 모두 숙연해졌다. 자매 중 작은 아이가 계속 하늘을 향해 손을 찌르며 했던 말은  '엄마'였다. 엄마는 하늘에 있고, 아빠는 코카인 중독자라는 것이다. 모니카는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며 계속 울었다. 어쩌면 세상을 조금 알기 시작한, 아직은 어린 언니의 표정이 너무도 슬펐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매일같이 술판이 벌어지고 담배 연기가 자욱하며 마약을 한 남녀들이 어슬렁거리는 그 곳에서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장난을 치는 어린 동생의 모습은 더욱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우리는 그  어린아이들을 두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페데릭은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모니카를 계속 설득했다. "모니카, 넌 최선을 다했어. 아이들이 불쌍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진정해." 모니카가 울며 말했다. "아니, 나는 저 아이들을 새벽에라도 데리고 나가고 싶어. 뭐라도 사 주고 싶단 말이야." 우리는 모니카를 말릴 수 없었고, 모니카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로마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머릿속은 복잡했고, 귀에는 술에 취했는지 마약에 취했는지 모를 젊은이들의 괴성 소리가 내내 둥둥거렸다. 해가 뜨기 시작한 이른 새벽, 나는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한 뒤  지난밤 나의 마음을 달래 주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젊은 친구들의 침대 보에 작은 빵 하나씩을 두고 호스텔을 나왔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여행의 마지막, 그 이틀간의 시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여행의 마침표를 이제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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