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춤을 추던 사람들
우리는 안시(Annecy)로 향하고 있었다. 안시는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호수 도시로, 패러글라이딩을 비롯한 레저 스포츠와 휴양의 메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 내에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관광객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실제로 안시의 거리를 걷는 동안 아시아인을 본 게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안시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풍경에 어느새 초록의 높은 산맥들이 듬성듬성 비치자 나는 알프스 산지 지역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차역 플랫폼에 발을 딛자, 이곳이 소도시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파리와 렌에서 보았던 많은 인파와는 달리 안시의 기차역은 작았고 사람들도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시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숙소는 안시에서도 매우 높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기에, 우리는 자동차들이 오가는 가파른 도로 위를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갔을까, 탁 트인 호수의 전경이 푸르게도 우리의 눈가에 스며들었다.
우리는 어서 빨리 호수에 가고 싶은 마음에 한걸음에 숙소로 달려갔다. 무거운 배낭 짐을 풀고 다시 그 가파른 경사의 도로를 뛰는 듯이 걸어내려 왔다. 호수는, 에메랄드 빛 자체였다. 알프스 빙하 녹은 물로 이루어진 안시 호수는 그 크기가 너무 커서, 마치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산들은 그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는 섬 같이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곳곳에 일광욕을 즐기기 위해 윗옷을 벗어던지고 산책을 하는 안시의 사람들을 지나며 산책로를 걸었다.
산책로를 따라 10여 분을 걸었을까, 어느새 안시의 시내이자 번화가에 도착했다. 포털사이트에 안시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미지와 같은 풍경이 우리를 반겼다. 색색으로 벽을 칠한 집들 사이에 어색하면서 동시에 운치 있게 세워진 잿빛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안시의 일상은 여유로웠다. 관광객도 그리 많지 않았고, 어딘가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대도시의 그런 인파는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시간 흘러가는 대로, 호수가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다들 살아가고 있었다.
번화가를 벗어나자 호수를 둘러싸고 공원이 여유로운 안시의 일상을 더 초록빛으로 가꾸어 가고 있었다. 잔디밭에 누워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책을 읽는 노신사, 강아지와 뛰어 노는 어린아이들... 그들 나름의 걱정과 근심은 모두 이 곳에 나지막이 앉아 있으면 초록빛에 조용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잔디밭에 앉아 내리쬐는 햇살을 맞고 있었다.
공원 밖으로 다시 보이는 안시 호수의 모습. 카약과 요트를 타는 사람들이 보였다. 위태롭게 허우적대는 사람들부터 보트와 한 몸인 것처럼 자유롭게 호수를 떠다니는 사람들까지, 모두 안시 호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에메랄드 빛 호수는 가로수 잎사귀를 그대로 떨어뜨려 놓은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보다 더 여유로울 수 있을까. 나는 안시에서는 그 어떤 여행에 대한 걱정이나 현실에 대한 불안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저 수평선 끝까지 펼쳐진 바닷빛, 에메랄드빛 섞인 호수를 바라보면 그 풍경에 젖을 수 밖에 없었다.
안시의 해는 어느새 저물어갔다. 한참 넊을 놓고 호수에 매료되어 있었던 우리는 별안간 어떤 흥겨운 리듬에 이끌려 어디론가 걸었다. 그곳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안시 판 클럽이었다. 호수와 나무를 배경 삼아 펼쳐지는 신나는 리듬과 그에 맞추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사람들이 너무 정겨웠다. 우리는 작은 구멍가게에서 싸디싼 체리 와인 한 병을 사다 그들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마셨다.
클럽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엉성한 스테이지에 작은 전등 몇 개가 달려있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무대를 활보하는 할아버지의 능숙한 스텝에 나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모두들 그랬다. 짝을 맞춰 빙그르르 도는 남녀들과 신기한 듯이 주위에 둘러싸서 그 무대를 지켜보는 여러 관광객들이 뒤섞인 이상한 안시 판 클럽이었다. 해가 꽤 저물자 막 저녁을 먹고 노랫소리에 이끌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어느새 안시의 야외 클럽은 조그마한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우리는 갑자기 많아진 인파에 휩쓸리기 싫어 그곳을 빠져나왔다. 거리에는 형형색색 빛나는 조명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고, 낮에 보았던 번화가도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파른 것 같았던 길은 어느새 완만한 산책로가 된 것 같았다. 그만큼 안시에서의 짧았던 하루는 우리에게 여유를 안겨다주었다. 현실에 치이고 고민에 머리를 조아릴 때, 이 곳에서의 기억들이 대뜸 찾아들 것 같다. 에메랄드빛 호수 마을과 그렇게 춤을 추던 사람들. 안시에서의 잊혀지지 않을 기억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