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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별들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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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기 Sep 30. 2015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다

여행의 종착역, 로마에서

  

  여행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로마의 휴일'을 꿈꿨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가혹했을 폭염. 저녁이 되자 그 뜨거운 열기도 잠시나마 식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밤의 로마를 거닐기로 했다. 법적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로마의 건물들, 그 낮은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탁 트인 밤하늘은 황금색으로 물든 고대 유적들을 차분하게 덮어주고 있었다. 로마의 밤거리는 여느 관광지가 그렇듯 여행자들로 붐볐지만, 조금만 더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면 진짜 로마의 모습이 나온다. 집을 잃은 집시들, 외지인들을 경계하며 숨어 있는 까만 눈동자의 아이들. 그들을 뒤로 한 채 터덜터덜 걷다 보니 어느새 낮에 갔던 천사의 성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벌써 바티칸 자락에 도착했다니, 이렇게도 로마는 작은 도시다. 그 작은 도시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수 세기의 시간 조각들은 저마다 달빛 머금은 황금색 조명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천사의 성은 낮에는 굳건한 모습이었다면, 밤에는 은은하고 웅장했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천사의 성 입구로 향하는 다리에서 여행자들은 사진을 찍고, 노점상인들은 저마다의 생계를 이어가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참 천사의 성 주변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연주에 홀려 그쪽으로  걸어갔다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여행의 막바지에 도달하니, 이제 거리 음악가들은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점점 연주 소리는 가까워져 왔고, 나는 내 나이 또래 비슷한 젊은 청년이 반주 음향기기를 켜 놓고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구슬픈 선율은 아마 내  마음속에서 쉽사리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바로 코앞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을 듣고 있었다. 한참 연주에 심취해 있던 청년은 그냥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나만 홀로 덩그러니 서서 자신의 연주를 듣고 있는 나를 보고 잠시 웃었다. 그리곤 다시 연주에 몰입하기 위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내 시선은 떨어지는 청년의 고개를 따라 밑으로 향했다. 청년 바로 앞 바닥에 놓인 기타 가방 안에는 몇 개의 동전이 아무렇게나 담겨져 있었고, 어떤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나는 무어라고 쓰여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어서 가자는 친구의 보챔에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그저 걷고 있으면서 나는 계속 그 선율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어느새 우리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앞까지 걸었고,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인 것 같았다. 나는 한참 생각하다 친구에게 말했다. "아까 기타 연주 다시 듣고 싶은데, 조금만 더 있다 가자." 그리고 우리는 그 연주를 들으러 다시 10여분을 걸었다. 혹시나 밤이 늦었기에 자리를 뜨진 않았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신호등을 앞에 두고 다시 들려오는 그 기타 선율에 마음이 놓였다. 나는 그 청년 앞에 다시 서서 이번에는 기타 가방 안에 쓰인 글씨를 똑바로 읽었다. 

 'AN ARTIST IS NEVER POOR.'

 예술가는 절대 가난하지 않다.  순간 그 문구와 그 앞에 놓인 몇 개의 동전들이 겹쳐 보이며 내  마음속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나는 그 청년의 연주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물러서서 천사의 성 옆을 흐르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기대어 연주를 듣고 있었다. 몇 개의 동전들을 벌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음악을 사랑해서인지, 혼신의 힘을 다하며 연주하는 젊은 청년의 바짓가랑이 사이에 놓인 반항적이고도 슬픈 메시지는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그저 듣고 흘려버릴 소리로, 누군가에게는 기타 선율과 함께  마음속을 울리는 소리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기 싫어 청년의 연주를 녹음했다. 시간이 흐르면 여느 일상의 사건들이 그렇듯 잊히기 마련인 감정들이지만, 훗날 그 감정의 끝자락이라도 붙잡아보려는 마음에서 일지도 모른다. 곡은 어느새 끝이 났고, 나는 청년에게 내 핸드폰을 보여주며 엄지 손가락을 내밀고 힘껏 박수를 쳤다. 천사의 성을 휘감았던 기타 소리들이 흩어져 자취를 감추자 거리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떠들어대는 소리, 그리고 그 속에서 어색한 내 박수 소리만이 허공에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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