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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기 Oct 17. 2015

자주 잃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더불어 쉽게 잊는 사람이기까지 했다면 좋았을텐데


  나는 평소 행동거지가 칠칠맞다. 게다가 부주의하고 무신경해서 자칭 타칭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내 손에 들어온 것들을 고장내거나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사실, 고장이 나면 불행 중 다행일 정도로 손을 떠나 사라지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공책이나 필통 같은 작은 것들부터 시작해서 큰 값의 돈과 신발, 가방, 아빠가 사준 태블릿 PC까지.. 이제는 무언가 잃어버리면, '어디서 잃어버렸지?'가 아니라 '아! 또 잃어버렸네. 그건 애초에 내것이 아니었나 보다' 하며 되찾는 것도 포기해버린다. 그러나 자꾸 생각이 나고 후회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었더라면', '지금 이 순간에 그 물건이 있었더라면' 하고 미련이 뒤를 밟는 것이다.


이렇게 반복된 습관과 생각이 어느 순간,

나의 인간 관계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이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면..


  자주는 아니지만 시간의 흐름속에 가끔 유실되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과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벌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혹은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더 이상 서로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확신에 이르게 될 때. 물건을 잃는 것과 사람을 잃는 것은 확연히 달라서, 처음엔 '우리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하는 생각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내가 조금만 더 마음을 맞췄더라면', '지금 이 순간에 그 사람도 함께 있었더라면' .. 그들이 내 기억 속에 두고 간 선물을 되돌려 준다는 핑계로 다시 붙잡고 싶기도 했고,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전해주었던 온기가 마냥 그리워 함께 채워 넣은 추억의 서랍을 뒤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사람과 나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다'며 '서로를 놓아주는 게 최선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꽤나 어렵지 않게 포기하고 만다.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대하듯이.


그렇다고 인간 관계를 가볍게 보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예전만큼 아등바등 하지 않을 뿐이지, 포기한 뒤에도 쉽게 잊질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그래서 토로한다.


'자주 잃고 살아도 괜찮으니,

쉽게 잊는 사람이기까지 했다면' 싶은 아쉬움을.


  워낙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까, 새로운 만남에 거부감은 없지만 불안감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언젠가는 끝을 맺어야 하는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 너무 마음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그 사람을 향해 움직이는 마음을 멈추는 대신 멍청한 머리를 억지로라도 굴려보는 것이다. 사람을 대하면서 머리를 굴린다는 게 내게는 결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었는데, 사람이 싫어지는 게 싫어 어떻게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방어를 취하는 태도를 이제는 납득하고 이용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영원히 지켜내는 것이 진실로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 불가능에 대비하여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매일 매일 잊는 연습을 하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보다 좀 더 용감한 겁쟁이가 되어야 한다. 먼저 다가가 손 내밀며 웃을 줄 알면서도, 떠나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 원망스럽지 않도록 적당한 간격을 유지할 줄 아는. 혹은 그 자리에 홀로 남아있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가지 않고, 혼자서도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갈 줄 아는 그런 연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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