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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기 Oct 03. 2015

새삼 다가온 새 삶

가끔 행복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깜짝깜짝 놀란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지 말 것

미래를 말하며 과거를 묻어버리거나

미래를 내세워 오늘 할 일을 흐리지 말 것 -


박노해 작가《겨울이 꽃 핀다》에 실린 시 '경계'(全文)에서 - 를 삶의 신조로 정해 두고 살았지만, 나는 항상 먼 미래의 행복을 내다보며 현실 도피를 즐겨했다.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진 않았지만, 반대로 미래가 현실의 행복을 잡아먹게끔 내버려 둔 것이다.


왜 어째서,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이 순간의 순간들은 마냥 힘들고 버겁게만 느껴지는지. 막연한 것들로부터 항상 도망치고 싶어 했으면서도 현재만 버텨내면 미래엔 반드시 행복할 거라고, 어렴풋한 훗날에 덧없는 기대를 걸고 살아왔었다. 최근까지.


행복이 가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를 희망 고문하던 잔인한 삶.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언제나 곁에 있었기에 눈치 채지 못했던 행복의 참모습을, 나는 천천히 구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가까이 있을 수록 더 자세히 살피고 찬찬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머리 맡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눈부셔 깨어날 때. 자전거 폐달을 밟을 때. 선선한 바람이 나를 에워쌀 때.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 갈피에 끼워둘 수 있을 때. 서로의 바보 같은 행동을 시트콤 보듯 하는 친구들과 아무 걱정 없이 웃고 떠들 때. 그러다 가끔씩 오글거리지만, 서로가 서로를 남 몰래 아껴주고 있음이 들통날 때. 누군가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내 존재에 고마워해 줄 때. 나와 함께했던 시간을 그립다고 말하며 추억해줄 때. 기념하여 찍어둔 사진들을 넘겨볼 때. 미래에도 각자 삶의 일부분일 거라 의심 없이 확신할 때. 달갑지 않은 약속이 취소됐을 때. 집에서 뒹굴거리며 보고 싶었던 영화나 드라마를 실컷 볼 때. 그 속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났을 때. 내가 바라던 결말대로 이야기가 장식될 때. 방해받지 않고 늦잠 잘 수 있을 때. 베갯잇에 팔을 올려두고 시원한 촉감을 누릴 때. 사랑과 진심이 담긴 장문의 문자나 편지, 선물을 받았을 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끊기조차 아쉬울 만큼 오랜 시간 통화할 때. 맛있는 음식을 원하는 양껏 먹을 때. 평소 존경하던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을 때. 좋은 사람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때. 그 인연이 계속해서 같이의 가치를 빛낼 때. 가고 싶은 여행지의 후기를 읽거나 사진을 볼 때. 소풍을 떠나거나 놀이공원에서 시간을 보낼 때. 도서관에서 책 읽는 여유를 부릴 때. 길고양이가 야옹, 하고 먼저 나를 불러줄 때. 처음 본 아기가 낯가림 없이 사랑스럽게 웃어줄 때. 이벤트에 당첨됐을 때. 내 스타일의 쇼핑몰이나 특별한 옷가게를 발견할 때. 뒤이어 배송 중이라고 떠있는 쇼핑 상태 문구를 확인할 때. 갖고 싶었던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수집할 때. 기획한 대로, 계획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다이어트도 안 했는데 살이 빠졌을 때. 처음 듣는 노래가 전주부터 내 취향을 저격할 때. 좋아하는 가수와 소통할 때. 컨디션이 좋은 날 노래방에 있을 때. 영영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물건을 되찾았을 때. 응원하는 축구팀이 대승을 거뒀을 때. 고향 집의 현관문을 열어젖힐 때. 달려나와 반기는 동생들을 안아줄 때. (우리 집 막내라 할 수 있는) 앵무새, 앵두가 나에게 친한 척 굴어올 때. 동생들의 귀여운 장난에 가담할 때. 엄마가 차려준 밥상 앞에 앉았을 때. 부모님께 전해드릴 자랑거리가 생겼을 때. 부모님과 진솔한 대화를 통해 마음의 온기를 나눌 때. 흥미로운 시상이나 시나리오 소재가 생각날 때. 노력한 만큼 혹은 공부한 것보다 훨씬 더 결과가 좋아서 뿌듯할 때. 어찌 됐건 시험이나 과제가 끝나서 안심이 될 때. 혼자 씩씩하게 길을 잘 찾아갈 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을 때. 감동을 배로 갚아주는 입장일 때. 오해를 이해로 변화시킬 때. 애써 쥐어짜 낸 용기가 결코 헛된 게 아니었을 때... 등등,


이토록 셀 수 없이 많지만 그래도 굳이, 한 번쯤 일일이 곱씹어 나열해본다면 내가 얼마나 다복한 사람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다. 행복한 일이 연속으로 터진다던가 해서 행복한 기분이 지속되기란 어렵지만 어쨌거나 매일 매일 행복을 마주하며 살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고, 현실이다. 행복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변함없이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거대한 발자국을 남기며 찾아오는 이벤트보다 흔적 없이 소소하게 배어있는 일상 속 기쁨들이 우리 삶을 더욱더 향기롭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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