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인문학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완벽주의가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흰 실내화를 계속 거꾸로 신었다. 그래서 엄마가 토끼 단추를 왼쪽 실내화에만 달아주었다. 그러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토끼 단추가 이쁘다며 왼손으로 왼쪽에 신발을 신겼다. 그것도 시큰둥해지면 왼손으로 흰 실내화를 왼발에 끼우고 토끼가 오른쪽 발에 끼워지기 부지기수였다. 나의 완벽주의의 완벽한 실패 사례이다.
어쨌든 나의 내면은 완벽성을 향한 욕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무엇에 대한 완벽이냐 묻는다면 아리송하다. 하지만 나만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형태를 갖춘 완벽이라는 허상이 있다. 나는 그것을 애타게 찾아다니지만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좌절하고 훌쩍인다. 그것이 너무나 괴로워 구구에게 하소연을 했다.
“구구, 나 완벽주의인 거 알아요?”
“어렴풋이?”
“나는 완벽주의를 가진 사람들은 대게 틀에 맞고 깐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 스스로 그런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게 아닌가 불안해요.”
“강박이에요.”
“그럼 어떻게 완벽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루니, 나도 처음 사는 생이라 늘 불안하고 모호해요.”
“아, 그리고 루니. 지금 이 시간도 다 경험이 될 거예요.”
이후 구구에게 노자의 강의를 듣고 하품을 하다가 혼났다. 구구는 이상하지만 명석한 구석이 있으니 팟캐스트처럼 음성지원만 되면 좋을 텐데라는 상상을 했다.
구구가 말한 마지막 말은 진리에 가깝다. 내가 숨 쉬는 모든 순간은 다 나의 과거이자 경험의 시간이다. 좌절하고 완벽에 도달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순간도 다 경험의 순간이다. 완벽주의자였을 누군가는 이미 경험했을 괴로움이며 좌절일 테다. 하지만 여유가 없으면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늘의 밤을, 이 생각을 안겨준 이는 바로 나의 강아지 나무이다. 아침에 일찍 공방으로 출근한 구구, 그리고 방에 잠을 자던 나는 일어나자마자 씻고 나왔다. 4층에서부터 들리던 나무의 울부짖음이 2층 계단까지 들려 마음이 쓰였다. ‘오늘 저녁에는 꼭 산책을 가야지’ 생각했다.
저녁이 왔고 구구는 새로 준비한 낚싯대에 적응하기 위해 해변에 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무와 나도 데려가라고 해둔 터였다. 집에 도착해 원피스를 벗어던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무와 나무 간식, 나무 똥 싸면 담을 봉투, 등등을 챙겨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해변에 도착하고 차창 밖으로 밤바다를 나무에게 보여주었다.
“나무야, 저기 저 검은 게 다 바다야.”
나무는 나만 바라봤다.
“저게 바다라니까. 저길 봐.”
나무는 획 고개를 돌렸다.
파도 소리가 들리고 어두운 바다에 달빛이 반사되었다.
“나무야, 저길 봐. 바다에 달이 떴어.”
나만 호들갑스럽게 마음이 마음이 깨어나는 듯했다. 여유였다. 여유.
구구는 파란 물통과 낚시채비를 챙겨 해변으로 나갔다. 나무와 나는 목줄이 연결된 채 걸었다. 나무가 나를 중심으로 계속 원을 그리며 걸어서 어지러웠다. 나무는 세상이 궁금한가 보다. 지나가다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보면 그것을 주시했다. 그 맑은 눈을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무에게 감사한 하루이자, 고마운 하루이자, 미안한 하루였다. 나무 덕분에 달밤의 해변을 걸었고 낙엽을 같이 주시했으며 달빛을 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