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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륜휘 Feb 21. 2021

서부영화의 흐름

딱 여기까지만 살게요 

  공방 <바다가 분다>는 대로변에 위치했다. 차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여러 정황을 말해준다. 구구가 작업실에서 작업을 쉬는 중이라는 점. 공방 안이 조용하다는 점. 우리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는 점. 그럼에도 각자 할 일에 몰입 중이라는 점이 그렇다. 구구에게 내가 잘 사용하지 않는 아이패드를 선물했다. 구구는 몇 번 훔쳐본 게 다인데도 포토크리에이트 안에서 근사한 그림을 완성시켰다. 총을 ‘탕’하고 쏘는 모자란 남자처럼 보였다. 

  서부극을 좋아하는 우리 둘에게는 차이점이 있다. 

  “오빠는 왜 서부영화를 좋아해?” 물으면 그는 단 두 글자로 설명한다.

  “액션.”

  그는 영화의 매력을 킬링 타임에서 찾는 편이다. 반면 나는 영화를 전반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루할 정도로 서정적인 영화나 불안함을 조성하지 않는, 사운드가 안정적인 영화가 좋다. 그래서 나는 서부극을 좋아라 하는 편에 속한다. 구구와 함께 본 ‘하이 눈(High Noon)’이라는 옛 서부극은 정말 압권이다. 불안한 장면도 사운드가 옛 구성이라 눈만 감으면 된다. 무엇보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가 좋다. 세상에는 아름답게 죽어가는 영화도 많다. 그래서 종종 나는 죽고 싶어진다. '딱 여기까지만 살게요.' 하고 기도를 한다. 죽는 순간에는 B.J.Thomas의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가 나왔으면 좋겠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를 볼 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보기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장면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서정적인 영화가 좋은 이유는 불안하지 않게 해서다. 불안에 대한 민감도가 정상에 비해서 예민한 편에 속한다. 주변에서 조금 튀는 소리가 들리거나 화내는 소리가 들리면 침이 가득 입에 고인다. 이곳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전두엽의 신호가 내려지고 나는 도망간다. 아주 어릴 때 엄마와 아빠는 자주 다퉜다. 그러면 나는 도망 갈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발견한 데가 책상 아래였다. 책상 위에 이불을 덮어놓고 책상 아래 틈에 숨어 있다가 잠들었다. 명절날도 마찬가지였다. 큰집인 우리집에 사촌들이 모이면 어른들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나는 그 부산스러움에 또 쉽게 불안해졌다. 그래서 책상 아래에 숨어 잠자는 척을 했었다. 요즘은 그래서 명절날 집에 찾아가지 않는 편이다. 또는 가더라도 집 옥상에 올라가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옥상까지 사촌 조카들에게 발각되면 차를 타고 한적한 곳을 찾아 도망 다녔다.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은행 강도처럼 말이다. 협곡을 지나고 바위산에 숨어서 뒤를 망보고 다시 질주하는 주인공들의 대범함에 동일시 욕망이 일기도 한다. 그리고 무작정 달려도 지칠줄 모르는 그들의 체력을 닮고 싶다. 

  “일단 말을 타고, 총을 쏘고, 황량한 풍경이 마음에 들어.”   

  구구에게 구체적으로 서부영화가 좋은 이유를 물으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량한 풍경을 본 경험이 없기에 영화적 배경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한다. 

  “나는 말도 타보고 싶어. 말 타고 가는 주인공이 또 얼마나 멋있는데. 말은 운전하는 것 하고는 달라. 생명과의 교감이 있어야 해. 내 로망 중에 하나는 말을 타보는 거야. 근데 그건 앞으로도 힘들 것 같아. 말은 너무 비싸니까.” 

  나는 이런 구구의 말 한마디에 빛을 느낀다. 말은 운전하는 것과 다르다고 구구는 생각했다. 이유는 말이라는 생명과의 교감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고 설명한다. 생명과의 교감은 나무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나무를 입양하기 전에 많은 유예 기간을 두었다. 예전에 같이 살던 진돗개 두 마리가 아프게 떠나고 나서 마음에 짐이 있었던 탓이다. 남북이랑 통일이 생각만하면 눈물이 났다. 그래서 구구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준비가 덜 된 나에게 아직 반려견은 무리라고 했다. 항상 내가 반려견을 입양하고 싶다고 말하면 그는 되물었다.

  “잊지 않았죠? 반려견과 이별할 수 있어요?”

  그의 이런 깔끔한 물음들은 반려견을 키우고 싶은 욕망을 잠재우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나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데 가족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과정이 3번 정도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나무를 입양할 수 있었다. 

  “나무는 생명이예요. 이 인연을 지속해서 유지해야 해요.”

  구구가 구루로 다시 돌아온 듯 했다. 생명은 귀하게 여겨져야 마땅했다. 

  나보다 모자라는 남자로 태어난 구구지만, 나는 그에게서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리고 잊지 않으려고 기록해둔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에게 반려견 나무와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의사 선생님은 반가워진 얼굴로 “동물과의 교감이 정서에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동물과의 교감을 해본 경험이 없는 것 같았다. 나무가 처음에 와서는 아무 곳이나 똥도 쌌고, 욕실매트에 오줌을 누기도 했다. 또 쓰레기봉투를 갈기갈기 찢어놓기도 했고, 누워 있으면 계속 나를 핥아서 피곤했다. 시간이 차차 흐르면서 식사 후 킁킁 거리면 응가가 마려운 시간이란 것도 알게 됐다. 나무를 꼬옥 껴안고 싶어서 그렇게 하면 교감할 틈도 없이 나무는 머리를 빼서 빠져나갔다. 신발 끈을 다 풀어 놓기도 하고 설사를 하고 엉덩이에 똥을 묻히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 놀라서 나무를 세면대에 앉혀두고 씻겼다. 

  “네.” 

  안정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는 교감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오늘은 주말이었다. 진주에 살던 구구의 친구들이 공방으로 놀러왔다. 함께 음악을 하던 친구였다. 그들이 가고 난 후 구구는 기타를 만졌다. 

  “이제 노래가 좀 안정됐지요?”

  구구는 저음으로 노래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나는 글을 쓰느라 듣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해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구구에게 버스킹 하러 나가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싫어요.”

  구구는 음악은 보여지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충분히 연습하지 않고 길에서 노래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생각을 가졌다. 자신의 삶을 내보이는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내일은 연습을 해보자고 바꿔 말해 봐야겠다. 그럼 구구도 마음을 열고 음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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