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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Jul 10. 2017

비움

무소유의 부작용

옥돔은 얇고 넓어서 음식물쓰레기 봉투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해동을 좀 시킨 후에 척추를 접어서 봉투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씽크대 위에 옥돔 8마리를 올려놓고 있는데 딸이 학원에서 돌아왔다.

잠 자기 전에 냉동실을 모두 비우리라 결심한 지 1시간 40분이 된 거다.


정말 많은 걸 쌓아두고 살았다.

냉동실 문이 잘 안 닫혀서 내용물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비닐에 싸인 고기 덩어리가 떨어져 발등을 찍힐 한 적도 있었다.


원칙을 정했다.

'한 달이 지나도 안 먹는 건 죽을 때까지 안 먹는 거다. 최근 한 달 안에 손 대지 않은 건 다 버린다.'


카페베네에서 빙수 포장해올 때 받아온 아이스팩,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 케이크 사올 때 받은 아이스팩 등 아이스팩만 정확하게 9개 나왔다.

감, 어지간하면 곶감은 살려볼까 했는데 냉동실 특유의 그 냄새가 너무 진했다. 

친정 엄마가 주신 조기 10마리.

오징어  마.

제주도에 사시는 시어머니가 주신 옥돔 8마리.

가나초콜릿, 가나초콜릿은 요즘 판매되고 있는 건가?

쿠크다스 여러 개, 먹다 남은 오징어땅.

브라보콘도 편의점에선 못 본 것 같은데.

건새우와 멸치, 오징어채, 말린 쥐포.

고추가루, 이름 모를 가루.

미역과 파래.

심지어 더덕, 기자인 친구가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재임 시절에 행사에서 선물로 받은 거다.

생수병에 얼린 물.

옥수수, 10년 전쯤 평창에서 매운탕 먹고 오는 길에 샀다.  

 한 봉지, 생쌀을 왜 얼려놨는지 모르겠다.

비닐에 싸인 소고기, 돼지고기.

피자 두 조각, 우리 세 식구가 먹기에 피자 한 판은 항상 많다.

가장 많은 건 떡이었다.

대한민국에 유통되는 떡은 종류별로 다 있는 것 같았다.  


15년 결혼생활의 역사적인 골동품들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엔틱하게.  


5리터짜리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무려 7개나 채웠다.

이러다가 먹는 거 버렸다고 벌 받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죄다 버렸다.


"학원에서 별 일 없었니?"

소파에 앉으며 방 안에 있는 딸에게 물었다.

"…. 응."

딸이 좀 뜸을 들이더니 작은 소리로 대답을 했다.

너무 힘들어서 몸이 쪼그라들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내 어깨를 누군가 툭툭 쳤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옥돔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입을 막고 내 팔을 뒤로 꺾어 묶더니 질질 끌고 가서 냉동실에 욱여넣고 문을 꽝 닫아버렸다.

비명 한 번 질러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깜깜했다.

답답했다.

어깨로 냉동실 문을 힘껏 밀어보았다.

끔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해보았다.

곧바로 버리지 않고 해동하려고 씽크대에 올려놓은 옥돔 녀석들이었다.  

날 묶을 때 한 놈은 팔짱을 끼고 웃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냉동실 공간도 나 한 사람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은 데다가 손이 뒤로 묶여 있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오른쪽 발가락에 뭔가 툭 걸리더니 희미하게 한  빛이 들어왔다.

발가락 쪽에 빨간색 레버 같은 게 보였다.  

발가락으로 레버를 완전히 제쳤다.

빛이 들어온 곳에 양쪽으로 밀어야 열리는 문이 보였다.

양발로 모든 힘을 다해 문을 좌우로 밀었다.

문이 열렸다.

'선로에 내릴 때는 반편 열차에 주의하십시오.'라는 문구가 보였다.

몸을 밖으로 굴렸다.

앗!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대편 승강장 위에 있던 사람들 몇 명이 급하게 뛰어내려오더니 나를 부축해서 역무실로 데려갔다.

"역장님, 이 분 무릎을 다친 거 같은데요."

"오, 그러네. 구급약통 가져와봐."

"아주머니, 열차에서 떨어질 때 무릎을 다치신 거 같아요. 피가 많이 나는데, 우선 응급 치료 좀 해드릴게요. 걸으실 수 있겠어요?"

"네? 여긴 어딘가요?"

일어서려고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무릎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아주머니, 지금 몸에 가지고 계신 게 아무것도 없으시죠? 가족분 아무나 전화번호 좀 알려주시면 저희가 연락해드릴게요. 지금 반바지에 맨발이고 무릎도 다치셔서 혼자 가실 순 없을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허벅지가 다 들어난 후줄근한 반바지에 맨발이었다. 상의도 헐렁한 민소매였다.

"제 신랑 번호가 010 3082 58 …."

"010요? 012나 015가 아니고요?"

"네. 010 3082 …."

"010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어딨어요? 우리나라 전화번호는 012 아니면 015로 시작하잖아요."

"네?"

정신을 잃었다.

"아주머니, 정신 차리세요."

역장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저, 열차에서 제가 떨어진 거죠?"

"예. 반대편에 멈춘 열차에서 아주머니가 수동으로 문을 열고 선로 중간에 떨어지신 거예요."

"그럼, 그러면 저 다시 그 열차 타야 돼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족분 연락이 되면 오시라고 해서 보내드릴게요."

"아녜요. 아까 그 열차 다시 타야 돼요. 그 열차 언제 다시 오죠?"

"아주머니가 타고 오신 열차는 3개월 후에 와요."

"3개월요?"

"예. 근데 아마 때 되면 열차 안에 떡이랑 오징어, 아이스팩, 건새우, 생수, 고추가루, 옥수수, 과자, 옥돔, 피자 같은 게 잔뜩 먼저 타고 있어서 아주머니 타실 공간이 없을 텐데요."


"엄마, 야식으로 피자 시켜 먹을까?"

"어? …."

"소파에 침 흘리지 말고."

"피자를 먹어야겠니?"

"왜? 아빠 금방 들어오신다니까 피자 먹으면서 쇼미더머니 어때?"


생선 비린내가 확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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