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기사 May 13. 2019

돼지국밥

다섯 살 때 이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에 출발하기 전부터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엄마와 나는 손발이 잘 맞지 않았다. 엄마 혼자 가는 게 너무나 어색할 게 뻔해 보여서 내가 따라나서긴 했지만 삼복더위에 밭일 하러 가는 것만큼 내키지 않았다.       

이틀 전에 있었던 장례식에 엄마 혼자 다녀온 후 엄마의 표정은 분명 불편해 보였다. 장례식 후 이틀, 그러니까 돌아가신 지 닷새째가 되는 날은 마침 토요일이었고 꼭 가 한다고 했고 엄마 혼자 가기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했기에 고3의 귀중한 시간을 양보해서 엄마와 함께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용인에서 파주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버스, 전철, 택시까지 타고 찾아갔다.      


닷새 전에 돌아가시고 이틀 전에 장례식을 치른 분은 굳이 따지자면 나와는 7촌이나 되는 큰할아버지다. 나의 할아버지의 형님이다. 큰할아버지는 2남 2녀의 자녀를 두셨다. 나의 엄마는 그 2남 2녀 중 한 명도 아니고 그 어른들의 배우자도 아니다. 그 어른들의 사촌인 나의 아버지의 아내인 것이다.

엄마 입장에서는 남편의 사촌들과 만나는 것이고, 내 입장에서는 5촌 어른들을 14년 만에 만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난 얼굴도 모르는 나의 할아버지에게는 단 한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분이 내 아버지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는 큰할아버지의 자들, 그러니까 큰집 쪽 사촌들과 자주 어울려 지냈다 한다. 그런데 나의 아버지도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큰 쪽 사촌들과 나의 엄마는 점차 발길이 뜸해졌다고 한다.


거의 14년 만장례식에서 얼굴을 본 이틀이 지난 그 날, 엄마는 시댁의 사촌 큰아주버니 집에 가게 되는 것이었다. 어색할 게 너무나 당연했다. 그래도 엄마는 가야 할 이유가 있어서 간다지만, 나는 길에서 마주치거나 명함을 받았어도 모를 사이인 분들 집에 가는 게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왜 거길 꼭 가야 하는지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장례식 때 수고했으니 저녁도 먹고 산 상속 문제도 의논한다고 했다. 나도 꼭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돌아가신 나의 7촌 큰할아버지의 산이라면 엄마에게는 아무런 권리가 없을 텐데, 설령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나의 아버지가 안 계신 상황에서 엄마와 내가 손을 벌릴 염치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14년 동안이나 류가 없었는데 말이다.


잘 가꾼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을 지나서 들어가는 고급 주택이었다. 차림새가 정갈한 어른들이 이미 여럿 모여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둘러앉아 산 분배에 관해 논의했다. 작은 빌딩과 오피스텔을 남기셨는데 관리직원 월급 주고 대출금 상환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고 했다. 운영하시던 주유소는 겨우 적자를 면한다고 했다. 현금이 얼마인지가 관건이라고 했다. 현금으로 상속세를 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은행에는 돈이 별로 없다고 했다. 만약 현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빌딩과 오피스텔도 부득이 어느 정도는 처분해야 한다고 했다.      

7촌 큰할아버지는 생전에 큰아들, 그러니까 나의 5촌 큰아버지와 그 집에서 함께 사셨다. 

안방에 큰할아버지가 쓰시던 금고가 있었다. 높이가 1.5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5촌 큰아버지도 그 금고 안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금고 문을 열더라도 안방 문 쪽에서 보면 금고 문에 가려서 금고 안이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모두들 그 금고 안에 현금이 얼마나 있을지 설왕설래 말이 많았다. 은행에 돈이 별로 없다고 하니 금고에 현금이 많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7촌 큰할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본인이 교통법규를 위반한 것 같아서 상대방 피해자 쪽에 배상을 해줘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피해자는 다리만 좀 부러져서 보험으로 의료비와 파손된 차량만 배상해주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도로시설이 망가져서 복구비용이나 벌금도 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 분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즈음, 그러니까 저녁 8시쯤에 금고 기술자가 찾아왔다. 큰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금고의 비밀번호를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어서 불렀다고 했다. 

기술자는 토요일 저녁이라서 길이 너무 막혀 고생했다고 했다. 어차피 금고 여는 게 금방 될 일도 아니고 저녁도 못 먹었다고 해서 그 기술자에게 저녁상이 차려졌다. 저녁식사를 하면서도 그 기술자는 자기가 열어본 금고 중에 제일 큰 거 같다면서 쉽지 않을 거 같다는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기술자가 가지고 온 007 가방을 금고 앞에 내려놓자마자 모두 주위에 모여 앉았다. 영화에서는 항상 무언가를 훔치기 위해 금고를 몰래 열기 때문에 긴박하고 쫄깃쫄깃한 게 당연했지만 그 날은 몰래 여는 것도 아닌데 어른들은 물론 나까지도 왜 그리 가슴 졸였는지 모르겠다. 모두들 큰 소리 없이 기다렸다. 이게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일인가 싶어 좀 지루해질 즈음, 그러니까 30분쯤 지났을 때 기술자가 땀을 닦아내더니 조용히 말했다.

“집이 좀 덥네요. …. 쉽지 않았습니다.”     


어른들 중 한 분이 기술자를 배웅하고 가족들이 다시 둘러앉았다. 5촌 큰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말씀하셨다. 금고 안은 모두에게 보여주겠지만 형제들 간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분쟁을 막기 위해 원칙을 먼저 정하겠다고 하셨다. 모든 재산은 2남 2녀가 똑같이 나누어 갖고, 모든 일은 당신이 공정하게 주관하겠다고 하셨다. 나에게는 대학 등록금에 보태라고 300만원을 주겠다고 하셨다. 당장 현금이 없으니 엄마의 통장으로 넣어주겠다고 하셨다.      

금고 안쪽을 들여다본 어른들이 말했다. 금고 안에는 수십 장 되는 서류들만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감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 금고 안에 현금이 정말 하나도 없었는지 너무 궁금했다.


밤 10시쯤에 그 집에서 나왔다. 파주에서 용인까지 돌아오는 길은 더 멀게 느껴졌다. 택시, 전철, 다시 택시를 타고 집 근처에 도착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전화상담원으로 일했는데, 그 회사의 직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어서 조금 나이가 들면 알아서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현실이었단다. 엄마는 그 후 식당에서 일하며 적은 월급으로 나를 먹이고 기르셨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할 텐데, 만만치 않을 것 같다.  

    

24시간 장사하는 돼지국밥집에 들어갔다. 엄마가 눈치 보느라 저녁식사를 거의 못 했다고 해서 돼지국밥 두 그릇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엄마가 말했다.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한데, 네 아버지는 원래 오늘 갔던 큰집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랬던 거다. 친손자를 눈 앞에 직접 보여주면서 혈육의 정에 호소해서 조금이라도 유산을 받으려는 게 엄마의 계획이었던 것 같다. 남편 없이 살아온 엄마의 수십 년 고생이 한 순간에 모두 보이는 듯했다.

“할아버지가 결혼하고 3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해서 큰집에서 네 아버지를 데려와 키우셨단다. 네 할아버지는 더 이상 아들도 딸도 낳지 못하셨다. 넌 엄밀히 말하면 네 할아버지의 손자가 아니라 이번에 돌아가신 7촌 큰할아버지의 손자인 거다. 그래서 내가 너를 거기 데려간 거다. 원래는 친손자이지만 호적으로는 7촌인데 …. 7촌이라는 촌수가 실제로 있기는 한 건지, 그게 친족의 범위에 들어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 아버지도 안 계시고 해서 큰 재산 물려받을 거란 기대는 안 했다. 300만 원이면 네 등록금 내는 거에 큰 도움은 되겠다. 그거면 됐다.”     


돼지국밥에 돼지고기보다 콩나물이 더 많은 것 같다고 투덜거렸다. 말 없이, 천천히 그릇을 거의 비운 후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엄마가 말했다.

“돼지국밥에 돼지고기 들어 있으면 된 거지.”     

매거진의 이전글 베트남 스키부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