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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PD Apr 14. 2021

열린 사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고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1권은 모두 읽었지만 2권은 읽어줄수가 없었다. 왜 민음사는 1권은 개정판을 내놓으면서 2권은 97년도판을 고수하는 걸까? 내가 산 책은 2016년 9월에 21쇄를 찍은 것인데 이 정도면 중간에 개정판을 냈어도 충분히 낼 수 있었을것이다. 이 책은 글자 포인트가 7~8포인트 정도 될라나? 또 글줄은 왜이리 많은지, 한 페이지만 읽어도 눈이 아파서 읽어줄수가 없다. 전철에서 읽을 때는 정말이지 눈이 팽팽 돌아서 토할 것만 같았다.


 1권은 주석을 과도하게 넣어서 가지고 다닐 수가 없이 만들어놓고 (638페이지중 주석이 300페이지), 2권은 97년도 판 그대로여서 읽을 수 없이 만들어놓다니, 이쯤되면 민음사의 의도적인 방기라고 생각할수밖에. 이 책으로 발표를 해야 했던 나는, 결국 2권 읽기를 포기하고 다이제스트 해설서를 읽을 수밖에 없었으니. 이런 제길. 암튼, 책의 만듦새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유대인이었던 칼 포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석학이라고 한다. 젊어서 듣게 된 아인슈타인과 마르크스의 강의가 그의 인생의 두 개의 축을 이루는데, 과학철학쪽에서 '비판적 합리주의'라는 사조를 이끌었고, 사회과학 쪽에는 전체주의를 비판하면서 ‘열린사회를 위한 점진적 사회공학’으로의 길을 천명한다. 나치즘을 피해 뉴질랜드로 망명하여 강의하고 있던 그는, 나치즘과 마르크시즘이라는 전체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 역자인 이한구 선생은, '전체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에서 이 책을 능가할 저서는 그때까지 없었다'며, '이러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한다.


자.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열린사회'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비판을 수용하고, 진리의 독점을 거부하는 사회'이다. 그는 열린사회와 대립되는 닫힌사회를 전체주의 사회라고 불렀다. 대표적인 전체주의 사회는, 나치즘과 마르크시즘 사회다. 극우와 극좌는 통한다고 하던가? 그 둘이 통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역사법칙주의'라는 사고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사법칙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이상을 향해 역사는 나아가고 있다는, 나아가야 한다는 믿음이다. 포퍼는 플라톤과 헤겔, 마르크스를 '역사법칙주의'의 원류라고 보고 이들을 통렬히 비판한다.



플라톤은 최상국가라는 국가의 이상향을 만들어놓고, 그로 나아가기 위해 '철인정치'를 주장한다. 즉,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포퍼는, "철인왕의 주권 이론 배후에는 권력으로의 추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주권자에 대한 아름다운 초상은 플라톤 자신의 자화상이다. 말하자면, 철인왕은 플라톤 자신이며, <국가>는 플라톤 자신의 왕권에 대한 요구"라고 비판한다. 또한 플라톤이 정치철학에 있어서 가지고 있는 유일한 관심사는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 "라며, 이에 우리는 ‘사악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어떻게 정치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헤겔과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사회체제를 다른 사회체제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할 때, 새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캔버스를 깨끗이 지워버린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포퍼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새로운 도화지같은 건 없다. 그런 장소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가 어떠한 새로운 무언가를 향해 가는 와중에도 어떤 것들은 그 기능을 계속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지 시행착오를 통해, 즉 실수하고 개선하면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결국 독일 게르만민족만이 지배할 수 있다는 나치즘이건,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시즘이건,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진리를 독점하고자 하는 태도에서는 마찬가지다. 역사에 어떤 법칙이란 없다. 역사에 진화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얼치기 예언자가 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역사적 진화의 시간’을 앞당기는 것뿐이다. 그렇게 마르크시즘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져간다.



한때 열렬한 마르크시스트였던 포퍼는 마르크스 식의 역사발전에서 가장 일어나기 쉬운 상태는 다음과 같다고 단언한다.


“혁명에 승리할 때 실제로 힘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새로운 계급, 새 통치계급, 신종 귀족주의사회 내지 관료사회의 통치계급을 형성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집단의 노동자들이 다른 집단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 같은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유방임주의가 이미 지구의 표면으로부터 사라졌으나, 그것을 대체한 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다. 현대 민주국가의 경제체제를 공산주의 혁명의 10대 강령과 비교해보자. 이 강령 가운데 대수롭지 않은 것을 빼놓고 보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 강령의 대부분이 완벽에 가깝거나 상당한 정도로 실천에 옮겨져 있다. 더해서 마르크스가 미처 생각해 보지도 못한 아주 중요한 조치들이 사회보장의 방향으로 취해져왔다.”




그렇다면 포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우리가 비판정신을 가진 합리적 개인이 되어 논쟁과 토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역사의 주체자임을 주장하고, 스스로의 결단과 행위에 의해 역사가 진전되어간다는 믿음을 잃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누가 국가권력을 행사하느냐’하는 질문은 ‘어떻게 권력이 행사되느냐’와 ‘얼마만큼 권력이 행사되느냐’라는 질문에 비해서 중요하지 않다. 역사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않지만, ‘정의와 자유와 평등을 위해, 열린사회를 위해’ 우리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실험과 토론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읽는 내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거였다. 그래, 참으로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비판적 합리주의 정신을 가지고 논쟁과 토론을 통해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을 갖는 것이 좋은 지배자를 만나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현명한 방법이다. 어쩌면 더딜 수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다. 혁명보다 개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시민이 말한 ‘민주주의란, 국민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를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드는 힘’을 말하는 것일테다. 포퍼는 이성적인 제도의 힘을 믿었다. 3권 분립이 되고, 사법부가 독립하고, 시민들이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을 할 수 있는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모두가 합의하는 더 나은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아름다운 현실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첫 번째로 드는 의문은 이런 거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나 비판적이고 합리적일까? 만약에 우리가 합리적이라면 계급투표를 할 것이다. 자신의 계급을 위해 일하는 정당에 투표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익히 알다시피 사람들은 계급투표를 하지 않는다. 채사장은 ‘지대넓얕’의 정치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본가가 보수를 지지하고, 노동자가 진보를 지지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줄 입장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매우 자연스러우며 합리적이다. 자본가가 진보를 지지한다면 그의 판단은 정의롭다. 마지막 노동자가 보수를 선택한다면? 이 판단은 조금 이상한데, 이 판단은 단적으로 어리석다” 이익을 고려한 경제적 판단도 아니고, 윤리적 판단도 아니고, 그는 누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판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어리석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판단능력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비록 노동자이지만, 자본가를 욕망하면서 그것과 동일시하고 그 정체성을 내 것으로 하기 때문이다. 돈을 욕망하고, 권력을 욕망하고, 지식을 욕망하고 혹은 그 셋을 모두 가진 자를 욕망하기에 그들의 포지션을 따라간다. 만약 우리가 비판적이라면 그 욕망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비판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아서, 돈과 권력과 지식을 욕망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그것을 가진 자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 대중의 욕망을 만들어낸다. 자, 나를 욕망해봐. 나를 동일시해봐. 그러면 언젠가 내가 될 수 있어. 그들은 그렇게 욕망을 조작하고, 시스템 위에서 판을 기획하며, 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만들어간다. 그렇기에 점진적 개혁은 ‘그들만의 개혁’으로 되고 만다는 것은, 포퍼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지금의 당면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무현의 탄핵과 이명박근혜 정권과 박근혜의 몰락과 이제 1년 남은 문재인 정권에 대한 실망 등 근 20년 정도의 한국의 정치사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국민투표를 통해 다수결로 당선이 되었다. 포퍼는 이렇게 말한다.


즉, ‘누가 통치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집중하기보다, 최악의 지배자에 맞설 방법은 무엇인가? ‘통치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길들일 수 있을까’하는 보다 실질적인 물음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그의 말을 생각해본다. 그는 우리는 우리 시대에 해결하려고 선택하는 문제들을 눈여겨보며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우파와 좌파를 떠나 민주주의 체계에서 태어나 박근혜를 탄핵하고, 조기대선으로 문재인정부를 탄생시켰지만 그의 쓸쓸한 정권말기를 목도하고 있는, 박원순의 자살과 그로 인한 재보궐선거를 하지만 젠더 이슈 따위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 그런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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