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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PD Apr 30. 2021

우리는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고

근대 유럽에서 발생한 '자본주의'라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상이었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면서 상업의 발달과 자본의 축적, 잉여노동자의 증가 등으로 자본주의를 설명한다. 마르크스의 이런 설명은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것들(하부구조)이 이데올로기와 법과 같은 정신적인 것(상부구조)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에 베버는 의문을 품었던 것 같다. 


오로지 물질적인 것만으로 사회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오로지 하부구조의 변화에 따라서만 상부구조가 달라질까? 하나의 새로운 사회가 등장할 때는 단순히 경제활동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정치 이데올로기 문화 등의 정신적인 면이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베버는 중세 유럽에 나타나기 시작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태도"를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새로운 경제체제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상공업과 화폐제도의 발달이라는 제도적 변화도 필요하지만 그에 맞는 새로운 정신을 지닌 집단이 있어야 한다. 이에 그는 자본주의 발생을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칼뱅주의에서 찾아낸다.



베버가 칼뱅주의에서 자본주의의 핵심이 된 정신을 찾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정설'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처럼 카톨릭의 만연한 부패, 특히 돈을 받고 천국에 갈 권리를 파는 면죄부에 대한 반대로 일어나게 된게 종교개혁이다. 그들은 성당과 신부라는 매개체 없이, 오직 성경에 따라 굳건한 믿음으로 신 앞에 단독자로 살기 원했다. 그 결과는 끝없는 불안이었다.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없을까? 그것이 미리 예정되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들은 자신의 불안을 '노동'과 '성공'을 통해 상쇄시켰다. 일상에서 성실하게 노동하고 그 노동으로 성공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움이다. 그 성공으로 다른 이를 신의 앞으로 더 많이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콜링, 천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공과 노동과 윤리와 신실함과 돈이라는 서로 함께할 수 없는 것들이 뒤엉켰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신의 은총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그들은 열심히 노동했고, 성공했고, 부를 추구했다.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 지역에는 유독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왜 노동하는가? 이미 자본주의 시스템이 고도화된 시대에 태어나 자본주의 윤리, 즉 노동의 윤리가 자리잡힌 상태에서 태어난 우리에게 노동의 이유를 묻는 것은 더이상 종교적이지 않다. 우리는 천국에 가거나 신의 은총을 받을 생각이 없어도 노동한다. 왜 그럴까? 생존을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소비하기 위해서? 일을 하는 이유로 출세와 인정을 말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걸까? 노동을 통해 나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 그리고 나에 대한 인정의 크기는 결국 '화폐'라는 결과로 보여진다. 화폐가 있어야 친구도 만나고 애인도 사귀고 결혼도 하고, 옷을 사고 가방을 사고 집을 사고.. 매슬로우가 욕구 5단계를 말하면서 생리적, 안전, 소속감, 존경, 자아실현의 욕구를 말했다면, 오늘날 이 모든 욕구의 단계는 화폐로 연결되고 화폐로 말해지며 화폐로 가늠되어지는 무한 반복 시스템.



예정설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건 아들러심리학에서 말하는 '목적론'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예정설'은 이렇게 말한다. 구원받을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이미 정해져있는데, 그것은 지금의 나에게 노동과 성공, 부로서 나타난다. 아들러심리학은 '개인심리학'이라고도 불리는데, 한마디로 과거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가에 따라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미래에 성공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잠재력을 키워 성공할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자기계발의 시초라 불리는 책 사무엘 스마일즈의 <self- help>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로 불리는 것이나, 자기계발의 시조라고 평가받는 데일 카네기, <네 안의 잠든 거인을 깨워라>의 저자 앤서니 라빈스,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법칙>으로 유명한 스티븐 코비 등이 아들러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즉, 자본주의를 있게한 프로테스탄티즘이 은총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윤리였다면, 현대는 종교와 상관없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도태되는 불안을 이겨내기 위한 자기계발의 윤리인 것이다. 매일매일의 자기관리를 위한 대명사 '프랭클린 플래너'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모범 프랭클린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 책의 마지막 즈음에 베버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 영리 추구가 가장 자유로운 곳인 미국에서 종교적, 윤리적 의미를 박탈당한 영리 추구는 드물지 않다....이 문화 발전의 '최후의 인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옳은 말이 될 것이다. 즉 '정신 없는 전문가, 가슴없는 향락자: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인류가 전례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p.163) 


우리는 왜 일을 하는가? 일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출세? 인정? 생존? 고통?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가치도 있고 싶고, 인정도 받고 싶고, 성공도 하고 싶고, 돈도 벌고 싶다. 이런 내 생각이 자본주의 정신에 맞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계속된 의문이 있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나는 아직도 그런 꿈을 꾼다. 10년 전의 내가 그 두 가치 사이에서 분열적으로 질주했다면, 지금의 나는 그 완충지대가 있음을 모색한다. 적어도 정신과 가슴이 없는 전문가나 향락자는 되고 싶지 않기에, 계속 의심하고 계속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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