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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Eunhye Jeong Sep 22. 2022

난류(亂流)에 비춰 본 음악미학

카오스적 질서와 프리재즈

우리 가족은 단 한 명뿐인 외향적 성격의 엄마마저도 소곤소곤 말하는 조용한 집이다. 자라온 환경과 타고난 기질이 만나 나의 목청도 가냘프기 그지없다. 그리고 이런 점은 2015년도부터 간헐적으로 이뤄진 판소리 수업 때 발가벗겨진다. 통성의 두툼한 소리가 거침없이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동시에 다채로운 결이 복잡한 무늬와 음영을 만들어가는 판소리. 나의 소리는 그 성음의 경지에는 단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했다. 선생님을 따라 힘껏 소리를 내다보면 목이 갈라지거나 소리가 아예 끊어지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여. 폭포 밑에서 공부를 할 때 영 목소리가 안 나와서 답답한 적이 있었지. 바위에 앉아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다가 깨달았어. 물이 잔잔허니 물 양이 적고 속도도 느리면 물은 작은 돌도 넘지 못하고 막혀버려. 아니면 돌아가야 하지. 물의 양이 충분하면 바위도 거침없이 넘을 수 있어. 목을 얻는다는 것이 그런 것이여.”


힘찬 물줄기가 크고 작은 바위를 부딪힌다. 어딘가 고이거나 멈추지 않고, 잔잔히 돌아가지 않는다. 소용돌이와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혼돈한 흐름이 펼쳐진다. 다만 그 방향은 지속된다. 필립 볼은 그의 저서 <자연의 패턴>에서 ‘자연의 흐름의 대부분은 난류이다. 즉, 너무 빨리 흘러서 그나마 있는 질서도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라며 ‘흐름과 혼돈’에 숨은 질서를 논하는 장을 시작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커다란 질서 속에서도 카오스적이고 불확정적인 우주가 펼쳐지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경험하곤 한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자연의 물리적 운동과 그 특성을 세심히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부단히 애써왔다. 


"물의 흐름에 대한 다빈치의 스케치는 오랜 시간동안 주의깊은 관찰을 통해 이뤄어졌다. 겉으로 보이는 무질서 이면의 “필수 형태”를 발견하려는 그의 결심을 보여준다." (필립 볼)


세계를 탐구하고자 끊임없이 미지의 영역, 우주의 '난류’같이  혼돈한 패턴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용기가 과학자와 예술가의 공통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금 낭만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음악가로서의 나는 안정과 지속의 욕구가 인력(引力)을 발휘하는 중에도 삶과 음악의 불확실성에 나를 내던지는 도전을 하곤 했던 것 같다. 


판소리 발성을 경험하고 배우면서, 자연의 패턴, 그중에서도 난류의 질서를 음미하고 내면화하게 되었다. 난류와 닮은 패턴의 그 외연을 의식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그러한 내면의 리듬을 발견하여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 즉, 직접적으로 나의 내면세계를 소리-물성화 시킨다는 것을 제반의 음악 작업의 한 지향점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작업이 2018년도부터 시작하여  2주 뒤면 발매될 음반까지 총 7개의 앨범으로 영글어 세상에 나오면서 나는 이를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의 작업들을 인지하고 소화하는지를 관찰할 수가 있었다. 


자연은 제품이 아니다. 잘 팔리는 제품이 되고자 하는 의도와 목적성 또한 갖지 않는다. 나의 음악 작업도 자연의 이런 점과 같다. 대중음악이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는 훅과 경험된 성공 공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다르게, 그저 자연스레 ‘자라나’서 소리로 ‘나타난’ 음악이다. 그렇기에 다수의 청중에게 하나의 앨범이며 ‘프리재즈’의 장르에 속하는 악기 연주 녹음이라는 것 이외에는 쉽게 즉각적으로 이해할만한 기준점이 없다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는 정말 오랫동안 재즈, 프리재즈, 자유 즉흥음악을 향유해온 전문적인 평론가 집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의 구조를 논한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에 충분히 이해할만한 점이다. 실기자 중심의 음악 담론이 부재하는 점도 한몫을 한다. 


나는 예술사학자인 마틴 켐프(Martin Kemp)가 말하는 구조적 직관을 따랐을지도 모른다. 지난 봄과 여름 내내 매주 토요일 부모님과 북한산 둘레길을 다니면서 자연을 만났다. 어찌 보면 산은 그저 나무와 흙의 집합체일 뿐이지만 나는 매주 새로운 산을 만났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자연의 패턴을 알아보는 감각을 단련했다. 매일의 날씨가 다르고 매일의 내가 다르며 얼마나 그 작은 변화를 섬세하게 감지하고 인지할 수 있는지에 따라 풍부한 감각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대상의 변화뿐만 아니라 인지 주체의 변화가 경험의 다채로움에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난류는 혼돈 그 자체로 인식되기 쉽다. 아마도 처음 즉흥음악이나 프리재즈를 듣는 사람들은 난류와 닮은 이러한 때론 거친 혼돈의 음악이 과연 음악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청중에게 난잡한 유체의 흐름 이면에 존재하는 모종의 질서를 파악하려는 과학자의 노력과 예술가의 직관을 직접 실행해 볼 것을 조심스레 권해볼 수도 있다. 위로가 된다면, 과학자들 또한 난류를 수백 년간 연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이해했다고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필립 볼에 의하면, ‘난류와 관련된 유체 흐름의 기본적인 장애물은 모든 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고 받는다는 것이다. 매우 작고 미묘한 차이에 대해 소도 매우 예민한, 흐름의 민감성이 상황을 혼돈에 빠뜨린다. 특정 시각, 특정 위치의 유체 패턴을 보고 다음 단계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자유 즉흥연주 기술로 음악을 형성, 생성하는 모든 음악적 작업물에 적용되는 말이다. 모든 자유 즉흥 연주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음악 창작자의 근원적 주체가 연주자 자신일지라도 특정 시공간, 관객의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작용들이 음악의 결과에 개입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난류를 불확정성과 카오스 뒤에 숨은 코스모스의 대명사로 표현할 수 있는 한편, 난류의 실제적인 물리적 현상과 패턴도 내가 음악적으로 경험하고 구현하는 요소이다. 바로 부딪힘과 소용돌이다. 나는 종종 소리를 시각적으로 인지한다. 하나의 음이 소용돌이라는 모양이 어떠한 상징처럼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운동성이 회전하는 에너지로 보인다는 뜻이다. 특히 이러한 심상적 내용은 ‘선율’이란 단어의 뜻과도 일치한다. 선율(멜로디)의 ‘선’은 돌다라는 뜻이다. 다시 필립 볼의 책을 참고해보자.


“유속이 충분히 느리면 유체는 장애물 주변을 부드럽게 돌아가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난다. 빠른 유속의 흐름은 장애물을 만나면 회전하는 소용돌이 쌍이 장애물 뒤에 나타난다. 더 빨라지면, 이 흐름의 자취는 지속적인 물결 모양을 파동으로 발전한다. 유속이 증가할수록 이 파동은 성장하고 물마루가 깨졌다 다시 감기고, 처음에는 이 방향으로 다음에는 저 방향으로 도는 일련의 규칙적인 소용돌이가 생긴다.”


Von Karman voltex streets in the Canary Island (left) and Jeju Island (right)


내가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일련의 에너지 흐름을 이러한 유체 흐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빠른 유속은 비단 증가된 속도뿐만 아니라 장애물에 강하게 가해지는 에너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중력과 가속도를 나름의 최대치로 끌어올려 음악적 ‘유속’과 ‘유량’을 증가시켜 연주할 때면 피아노 건반 하나를 타격하면서 얻는 한 음에서도 공간적인 소용돌이가 발생함을 느낀다 (듣고, 본다). 이를 피아노 연주를 하는 데 있어서 나의 ‘기세’라고 표현할 수 있을 텐데, 이는 유속에 따른 압력의 변화 관련되어 있다. 이 압력이 유체에 작용할 때에 자가 증폭(self-amplification)을 일으켜서 뚜렷한 파동의 모양으로 만든다고 한다. 


구름이나 대류의 패턴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큰 척도의 소용돌이도 있지만, 미시세계에도 같은 모습이 존재한다. 우연히 서점에서 본 양자 단위의 운동인 중성미자의 ‘스핀’ 모습이 그것이다. 한 ‘음’이 시공에 울리는 소용돌이는 대류보다는 작고 중성미자의 스핀보다는 크기가 크지만 결국엔 같은 결의 물리적 운동 작용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시세계와 거시 세계가 유사한 패턴과 원리로 운영된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과학적 철학적 개념을 통하여 유추해볼 수 있고, 설사 이점이 종교적 믿음에 가까운 것일 지라도 나는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높이의 음을 연주한다고 해도 피아노에 따라 연주되는 환경에 따라 소리 흐름의 방향이 다양한 각도를 가지고 난다. 그러한 변화와 다름을 세밀하게 감지하며 다음 각도를 설정하여 연주하는 일은 내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다만, 한시도 멈추지 않고 스스로를 변형하길 멈추지 않는 계곡물과 같이 나의 음악도 “자연스럽게” 그러나 “안간힘”을 쓰면서 “발생”한다. 


힘차게 나아가는 강물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패턴을 그리지만 분명한 것은 결국엔 결코 멈추지 않고 바다에 당도한다. 나의 음악 또한 결코 작은 지류에 머물지 않고 난류를 닮은 내재된 논리로 나아가다 보면 종래에는 저 광대한 바다에 닿을 것이라고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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