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Dot)이 되어버린 사람들:

영화 <제3의 사나이>

by 정희

중고등학교 시절, 주말 밤이면 나에게는 성스러운 의식이 하나 있었다. '빠밤~' 하는 웅장한 시그널 음악과 함께 사자가 포효하거나 횃불을 든 여신이 등장하며 시작되던 〈주말의 명화〉와 〈명화 극장〉을 챙겨 보는 일이었다. 부모님은 늦은 밤까지 TV를 본다며 야단을 치셨지만, 영화를 향한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극장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던 그 시절, 그 작은 브라운관은 나의 문화적 오아시스였다.


그중에서도 "따란 따란 따따~" 하는 경쾌한 선율, '해리 라임 테마'가 흘러나오던 영화 《제3의 사나이》를 잊을 수 없다. 1949년에 만들어진 이 흑백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불과 4년 만에 제작되었다. 화면 속 빈의 무너진 건물들과 산처럼 쌓인 잔해들은 세트장이 아니라 진짜 폐허였다. 그 리얼리티가 영화 전반에 흐르는 허무주의를 더욱 섬뜩하게 만들었다.


70년대 어느 날 밤 처음 본 그 영화는, 세월이 흘러 하나의 장면으로 숙성되었다.


지상 65미터 대관람차 위에서 해리 라임은 창밖을 가리키며 묻는다.


"저 아래 점(Dot)들 중 하나가 움직임을 멈춘다고 해서 네가 정말 슬퍼할까? 그 대가로 2만 파운드를 준다는데도?"


그는 사람을 '움직이는 점'에 비유하며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한다. 대상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인간을 통계나 점으로 치환할수록 도덕적 감각은 마비된다. 그 궤변이 섬뜩한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북한에서 내려오신 분으로, 6·25 전쟁을 직접 겪으셨다. 어린 시절 나는 그 전쟁의 트라우마가 두 분의 삶을 얼마나 깊이 짓누르는지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나 또한 마치 전쟁을 겪은 사람처럼 살아온 것 같다. 전쟁의 상처는 그렇게 세대를 건너 삶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4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볼 때마다, 그 대관람차 장면이 겹쳐 보인다. 전쟁을 지휘하는 높은 곳의 권력자들에게, 전장의 병사들과 민간인들은 해리 라임이 내려다보던 그 작디작은 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해리 라임의 궤변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그것이 이 낡은 흑백 영화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