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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청상 (紫電靑霜)

보랏빛 번개와 푸른 서리.

by 싱숭생숭

https://m.youtube.com/watch?si=GQwz5rLDXhTIzx6e&v=9CHpOrgvsvY&feature=youtu.be



보라는 늘 두 색의 경계에서 태어난다.

뜨겁게 번지는 빨강과 차갑게 가라앉는 파랑이 서로를 닳게 만들다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지 못할 때 남기는 타협의 빛.

그래서일까. 보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나는 늘 단정 대신 “중성”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환한 긍정도,

완전한 부정도 아닌,

한 걸음 물러난 회의 속에서 여전히 작은 불씨를 굳게 지키는 태도.

연보라가 유난히 어울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상처의 어두움이 아니라,

상처 이후의 빛깔. 피멍이 낫는 즈음의 색.

링크 속 노래를 틀면 방 안의 공기부터 달라진다.

소리가 커지지 않아도, 그 곡선은 분명하다.

서늘한 시작, 길게 늘어지는 잔향,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미세하게 올라붙는 파동.

보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리듬도 그런 것 아닐까.

폭죽처럼 터지는 쾌감 대신,

마음의 표면을 여러 번 쓸고 지나가며 서서히 침투하는 감정.

그 느린 침투가 끝났을 때 남는 것은 환호가 아닌,

“그래도”라는 미세한 결론.

그들이 믿는 희망은 대문짝만 한 구호가 아니라,

문틈을 통해 스며드는 밤공기 같은 것.

연보라를 좋아하는 이들의 말투에는 보통 쉼표가 많다.

문장을 끝내기 직전에 꼭 한 번 더 생각한다.

“아마도, 그럴지도.”

그 불확실의 여지는 무책임이 아니라 예의에 가깝다.

세계가 간단히 옳고 그름으로 갈리지 않는다는 조심스러운 인식.

그러면서도 한켠은 확고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내리는 판정만큼은 남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느리고 집요한 자의식.

회의와 확신이 공존하는 이 이상한 균형이야말로,

연보라의 정서지도일지도 모른다.

이들의 방은 대개 정리가 ‘완벽’하진 않다.

대신 질서가 있다.

읽다 만 책에 접힌 모서리, 자주 쓰는 펜이 놓인 위치,

유리컵에 붙은 물방울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까지 스스로의 리듬으로 받아들이는 방식.

보라색을 책갈피처럼 끼워 넣은 포스트잇,

연보라 조명의 낮은 색온도.

눈부심을 싫어하는 눈동자는 있지만,

어둠을 방치하지는 않는다.

대낮의 하이라이트 대신,

해질녘의 그림자를 선택하는 감각.

보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슬픔은 설명보다 느껴진다.

과거형으로 완전히 봉인되지 않은 채 현재형으로 살아 있는 슬픔.

그러나 그 슬픔이 자기연민으로 무너지는 장면은 드물다.

그들은 슬픔을 드러내되, 소비하지 않는다.

“내가 이만큼 아팠다”가 아니라 “아파본 자로서 무엇을 더듬으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염세의 인상과 이상하게도 실용의 향이 동시에 난다.

허무를 똑바로 바라본 다음,

내일의 일정에 체크를 남기는 사람들.

허무와 체크박스 사이의 저 특유의 간극이,

연보라의 아이러니를 닮았다.

노래가 후렴으로 들어설 때,

그들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눈빛의 초점이 약간 이동한다.

멀리 있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가까운 것을 보는 듯한,

혹은 그 반대의 움직임.

그 순간 그들은 결정을 내린다.

누구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아주 작은 결정을.

오늘은 조금 더 말하겠다,

혹은 오늘은 침묵하겠다.

오늘은 먼저 안부를 묻겠다,

혹은 오늘은 그냥 지나가겠다.

대단한 선언 대신, 생활의 스위치를 바꾸는 선택들.

비슷하지만 단단한 변경이,

이들의 희망이 실재한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보라를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건,

화려한 사건이 적은 대신 긴 여운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대개 관계의 초반에 자신을 과장하지 않는다.

장점과 단점의 소개서 대신,

일상의 습관을 조심스레 내민다.

상대의 리듬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이 무너지는 경계선을 명확히 기억한다.

그래서 때로는 차갑게 보인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벌이 아니라 보호이지 않을까.

둘을 위해서 필요한 속도 조절.

연보라의 관계는 늘 속도보다 방향을 먼저 고른다.

보라는 장례와 축제의 사이에도 놓인다.

어떤 나라에서는 애도의 리본이 보라였고,

또 어떤 무대에서는 환희의 스포트라이트가 보라로 쏟아졌다.

슬픔과 환희를 가르는 칼날이 너무 얇을 때,

사람들은 종종 보라를 집어 든다.

그래서 연보라는 무표정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무표정은 포기와 다르다.

거부의 표정이 아니라, 과열되지 않으려는 표정.

감정의 바깥쪽으로 일단 벗어나 중립지대에서 숨을 고르는 표정.

다시 말해, 살아남기 위한 표정이다.

연보라를 좋아하는 사람은 질문을 간직한다.

‘왜?’ ‘정말?’ ‘그럼에도?’ 이 세 개의 질문을 번갈아 돌린다.

‘왜?’는 세계를 해체하고, ‘정말?’은 자신을 검증하며, ‘그럼에도?’는 내일의 방향을 만든다.

세 질문이 회전할수록 사람은 단단해진다.

그렇다고 돌처럼 굳지는 않는다.

물에 닿으면 물이 되고,

불에 닿으면 불꽃의 테두리를 따라 번지는 성질.

그 가변성과 중심의 공존이 곧 보라의 성질인 것 같다.

연보라는 촛불의 언어에 가깝다.

뜨겁기로 유명한 붉은 불길이 아니라,

차가움과 동거하여 오래 버티는 빛.

이 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불을 오래 쓰는 방법을 안다.

큰 바람을 불러 환하게 밝히기보다,

손바닥을 오므려 불꽃이 스스로 길을 찾게 둔다.

그래서 그들의 방에서 밤이 빠르게 오지 않는다.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온다.

노래가 끝나가면,

방 안의 연보라색이 아주 엷게 옅어진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스피커를 끈 후에도 남는 잔향처럼,

다음 날의 기분을 결정할 만큼 미세한 남빛이 공기 속에 스며 있다.

그 여운 속에서 그들은 작은 일을 하나 더 해낸다.

밀어둔 질문 하나에 밑줄을 긋거나,

처리하지 못한 감정 하나에 이름을 붙이거나,

혹은 그냥 물 한 잔을 다 마신다.

별것 아니지만, 별것이다.

삶은 그런 규모로만 밀고 간다.

보라를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

무엇을 서두르지 않는지를 보면 된다.

빠르게 동의하지 않고,

쉽게 부정하지 않으며,

하지만 결국엔 자기 말을 책임지는 사람.

세계를 사랑하기엔 세계가 너무 시끄럽다고 느끼지만,

그렇다고 등을 돌릴 만큼 냉소적이지는 않은 사람.

그래서 그들의 희망은 늘 문장 끝의 마침표가 아니라,

반쯤 닫힌 괄호에 가깝다.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 어쩌면 끝내지 않기로 한 문장.

오늘 밤도 누군가는 연보라의 조도를 조금 낮추고,

같은 노래를 반복 재생할 것이다.

그 노래의 숨결이 방을 가득 채우면,

그 사람은 알게 된다.

자신이 어떤 종류의 슬픔을 품고 사는지,

그리고 그 슬픔이 왜 아직 희망과 함께 있는지를.

보라는 그 둘을 갈라놓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식히고 데우게 한다.

그래서 내일도 우리는 이 아이러니한 색을 좋아한 채로, 조금의 회의와 조금의 확신을 가지고 걷는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쉽게 환호하지 않는 이유를.

빠른 확신 대신, 오래 견디는 색을 택하는 이유를.

붉음과 푸름 사이에서 숨 고르듯 서 있는 그 자리,

거기에서만 들리는 호흡이 있기 때문이다.

그 느림의 한가운데,

아직 당신의 꺼지지 않은 불은 어떤 색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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