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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졸안빈 (守拙安貧)

결핍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임.

by 싱숭생숭


수업에선 당연히 앞을 본다. 나도 그랬다.

칠판, 슬라이드, 교수 목소리.

근데 어느 날부터 앞만 본다고 앞이 더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넓어지는 게 아니라 좁아지는 기분.

그래서인지 요즘 난 앞보다 뒤를 더 본다.

칠판보다 강의실 끝, 복도를 스치는 발자국, 한 번 멈췄다가 이어지는 소리.

그 사이에서 숨이 길어졌다가 금세 짧아진다.

멈춘다.

그러다 다시 움직인다.

예전엔 내 손이 먼저 움직였다.

칠판이 바뀌면 아이패드의 노트도 넘어가고,

밤엔 다시 펴서 줄을 긋고 빈칸을 메우고,

다음 날엔 또 정리.

그 리듬이 버팀목이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여백이 커지고 그곳에 낙서만 자란다.

연강이 이어진 날엔 아예 강의실에 안 들어가고 돌아선 적도 있고, 과제는 밀리고, 노트는 중간에 끊긴다.

게을러진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이게 내 삶에 뭘 남기는지 납득이 안 됐다.

손에서 의미의 끈이 빠져나간 느낌.

그 끈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 그냥 사라졌다.

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질문 던지길 좋아하는 교수가 내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랬더니 검색해서라도 찾아보라며 뻐팅겨봤자 계속 기다릴거라는 말과 함께 나를 기다렸다.

설명은 끊겼고 공기는 살짝 무거워졌다.

그 시간은 배움이라기보다 누가 위인지 확인하는 절차처럼 보였다.

펜은 손에 있었지만 노트에는 정리 대신 낙서만 쌓였다.

더 앉아 있는 게 이상해져서 조용히 나왔다.

복도 공기가 쓸데없이 시원했다.

그 시원함이 정상이었던 것 같다.

머릿속에 하나의 문장이 올라왔다.

여긴 아니다.

감정으로 던진 말 같지만, 솔직히 계산도 끝났다.

졸업 요건인 전공 학점은 45인데 이미 57의 숫자가 쌓였다.

여기서 점수를 조금 더 얹어도 내 앞길이 바뀌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겨서일까.

내가 요즘 붙잡고 싶은 건 정의나 공식이 아니라 사람, 장면, 기록이다.

두 시간을 쓰고 얻는 게 책 몇 줄과 검색으로 확인 가능한 것뿐이면,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자연스럽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일단은 나한테 남는 게 뭐냐의 문제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

아깝다. 정말 아깝다.

고등학생 때 아득바득 채운 생기부 30장.

학점을 우겨넣어 채워들은 시간표,

과할 정도로 빽빽하게 채워온 노트정리,

필기 합격을 하고 실기를 보러 가지 않은 따다 만 자격증들,

미래를 위해 쏟아부은 시간들.

하지만 아깝다고 느끼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게 더 무섭지 않을까.

그렇다고 아깝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붙들고 있으면 이상하게 더 잃는다.

그렇게 몇 번 데여 보니 알겠다.

아깝다는 건 기준이 되면 안 된다는 걸.

그래서 나는 그냥 빼는 중이다.

거창한 절차 이름 붙이지 않고, 표 같은 거도 안 그린다.

오늘 빠질 건 오늘 빼고,

내일 헷갈리면 내일 다시 주워든다.

유연한 척이 아니라 진짜로 그게 지금 내 수준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말한다.

그만두는 건 겁이라서 그렇다고,

비겁하다고.

모른 척하지 않겠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맞을 수도 있다.

근데 그 말까지 들고 가면 더 스스로의 길을 잃는다.

내가 내 삶을 정의할 때 타인의 기준을 크게 들이면 금방 방향 감각이 무너진다는 걸 여러 번 겪었다.

그래서 비겁하다면 비겁한 채로 내 쪽으로 갈 것이다.

이게 나한테는 덜 망가지는 길이다.

방학 때 신청했던 이차전지 프로그램에서 친구는 붙고 나는 떨어졌다.

축하는 진심이었다.

그러면서도 돌아오는 길에 주머니 안쪽에서 작은 조약돌이 굴렀다.

질투 같은 거? 있다.

허무? 그것도 있다.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그 조약돌을 버리지 않는다.

손끝으로 굴려본다.

어디서부터 숨이 짧아졌는지,

어떤 순간에 속이 비는지 그 돌이 가끔 알려준다.

친구는 내가 방향을 틀어도 이해해줬다.

그 이해 안에 경쟁 상대 하나 사라졌다는 안도가 섞였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지.

사람 마음이 늘 한 가지였던 적이 없으니까.

나도 마찬가지니깐.

해외를 운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진짜로 떠나겠다는 뜻이라기보다 그냥 멀어지고 싶다는 말이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골목 하나만 틀어 걷고, 알림을 잠깐 꺼두고, 강의실과 나 사이에 틈을 만든다. 그 틈에서 숨이 돌아온다.

이건 해결책 같은 게 아니지 않을까.

그저 오늘 내가 할 수 있었던 거리의 길이일 뿐이다.

어떤 날은 그마저도 안 된다. 그러면 그냥 안 되는 날로 남겨두고 억지로 끌고 가지 않기로 했다.

하고 싶은 걸 해보겠다는 마음도 있다.

해보면 대가가 붙는다.

빈칸이 생기고,

평점이 흐려지고,

예전에 쌓아둔 흔적들이 현재형을 잃는다.

감내할 수 있냐고? 지금은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고른 거니까.

책임이라는 단어를 거창하게 쓰고 싶진 않은데,

아직은 그 말밖에 붙일 게 없다.

해보고, 잃으면 감내하고,

그 다음에 뭘 남길지 다시 보면 되지 않을까.

순서 정해서 인생 프로젝트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친구에게 한 메세지가 왔다.

요즘 뭔 일 있냐고.

그 정도로 티가 많이 났을까.

그럼에도 이 친구는 전공을 살려 진로를 잡았기에,

같이 하는 여러 개의 팀 프로젝트는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내가 수업에 잘 나오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하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여태껏 같이 잘 공부해오다가 진로를 틀어버린 나를 붙잡으려고 했던 말이었을까.

그렇다고 공부를 아예 놓은건 아니다.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지,

상담심리 쪽으로 가려는 마음은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그곳에도 규칙은 있을 거고,

거기서도 누군가는 권위를 휘두를 거다.

그 가능성을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맞지 않는다면 과감히 포기할 것이다.

그 교육이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닌,

정형화된 틀에 갇혀 있다면 속절없이 도망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의 말과 표정, 침묵의 길이를 배우는 시간이 지금의 나와 더 맞는 것 같다.

나는 가끔 뒤를 본다.

뒷자리에서 누가 일어서는 소리,

복도에서 멀어지는 기척, 딱 그 정도만 확인한다.

그러고 다시 앞을 본다.

앞이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다.

또다시 흐려지는 순간도 있다.

둘 다 기록해둔다.

오늘은 딱 여기까지. 내일은 모른다.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려는 게 아니다.

그냥 모른다.

모른 채로 가본다.

그리고, 여긴 아니다. 이 말은 오늘도 유효하다.

내일 바뀌면 그때 지울 거다.

그 말도 적어두고 싶다.

현실적으로 “대학까지 나와서 그 정도 벌 거면 왜 그랬냐”라는 말을 들어도, 괜찮다고.

알바를 하든, 잠깐 쉬어가든, 그럴 수 있다고 넘길 수만 있다면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질지도 모른다고.

남의 기준으로 나를 재단하지 않고,

돈 액수보다 오늘을 얼마나 정직하게 살았는지에 더 마음을 둔다면, 그게 내 쪽의 안도일 수 있다고.

사실 다들 각자 고난을 들고 산다.

누구는 집안 사정, 누구는 몸, 누구는 마음.

그 무게가 다 다른데,

겉에서 보기엔 숫자 몇 개로만 비교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어쩌다 우리는 다시 서열놀이로 돌아왔을까.

타인의 시선이 쏟아지는 곳에 오래 서 있으면 내 목소리가 금방 작아진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짧게만 서 있다가, 내 쪽으로 물러나려고 한다.

나를 정의할 때 타인의 기준을 크게 들이면 금방 방향을 잃는다는 걸 여러 번 겪어서일까.

“대학까지 나와서도 그 정도냐”라는 말이 다음 번에 또 날아오면, 아마 그냥 지나가게 둘 생각이다.

설명하자면 길고, 설득하자면 지친다.

대신 나는 나한테만 짧게 확인하고 끊임없이 물어보려고 한다.

오늘을 너무 거짓 없이 살았는지,

아니면 대충 둘러댔는지.

그 질문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숫자는 나중에 따라온다.

안 따라오면? 그 또한 사실로 남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또다시 내 쪽으로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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