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움.
겉으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친구는 결국 그렇게 한다.
나는 매번 그 장면에서 멈칫한다.
내 판단이 틀렸다는 말은 듣지 않았는데도,
내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바뀐다.
나도 모르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감지된다. 다행이라고 느끼는 마음과,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마음이 동시에 올라온다.
이 두 마음이 하루 안에서도 여러 번 위치를 바꾼다.
최근의 나는 많은 이들에게 자주 묻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대답을 들으면 또 묻는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뭐야?”
내가 봐도 정말 피곤한 질문 세례들이다.
질문이 이어지고,
상대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는 순간을 본다.
그때서야 멈춘다. 하지만 이미 질문은 나갔다.
회수할 수 없다. 말은 종종 나보다 빠르다.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
그들의 생각과 주관을 듣고,
내 주관을 재정립하고 싶은 열망이 너무 앞섰나보다.
어떤 날은 내가 리플리니 뭐니 하는 단어에 스스로를 대입해 본다.
그 단어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단어가 아니라 지금의 내 모습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지는 충동 자체다.
이름을 붙이면 정리될 것 같은 기대가 생기고,
동시에 그 이름에 갇힐 것 같은 불안도 따라온다.
그래서 이름을 붙이려다가,
지운다.
다시 붙였다가,
또 지운다.
메모 앱의 지우개 자국이 하루 안에 몇 번이나 쌓인다.
솔직해지고 싶다.
늦게 시작된 솔직함이라 양이 조절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눌러놓았던 내용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느낌이 든다.
필터가 늦게 달린 정수기처럼,
일단 물이 쏟아지고 나서야 걸러진다.
누군가는 “네가 상처받을까 봐 말 안 했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동시에 억울하다.
내가 묻지 않으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아서.
묻고 나면,
내가 너무 밀어붙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다.
그러면 미안해진다.
미안함이 쌓이면, 다시 조용해진다.
조용함이 길어지면, 다시 터진다.
결국 또 반복이다.
친구에게서 괜찮다는 표정을 읽어내려 애쓴다.
그 표정이 진심인지,
관계를 유지하려는 예의인지 나는 구별할 수 없다.
구별하려는 시도가 이미 예의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헤집고 들어온다.
생각이 많다는 말은 편한 요약이지만,
실제로는 생각과 감정과 판단이 동시에 켜져서 서로의 소리를 덮는 상태에 가까운 것 같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기억이 흐려진다.
나는 토론을 좋아한다고 말해왔지만,
솔직히 말하면 요즘의 나는 확인을 원하는게 아닐까.
내가 본 것이 맞는지,
내가 느낀 것이 과한 게 아닌지,
다른 사람의 시야에서는 어떻게 보이는지.
그 확인이 지나치면 질문은 심문이 된다.
질문이 심문처럼 들렸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스스로 그 위험을 안다.
그래서 다시 줄인다.
줄이고 나면, 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사라지는 느낌이 견디기 어려워지면,
다시 묻는다.
튀어나온 말들을 회수하고 싶어지지만,
회수라는 동사는 말보다 더 느리다.
어떤 대화는 잘 끝난다.
우리는 서로 웃고 헤어진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으면,
그 대화의 한 문장이 귀에 다시 걸린다.
내가 던진 날카로운 한 마디,
상대가 피한 대답,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주제.
그 문장들을 집어 들고 뒤집어 본다.
무엇이 빠졌는지,
무엇을 과하게 했는지,
무엇을 굳이 했는지.
반성문 같은 분석을 쓰다가 중간에 멈춘다.
오늘은 기록만 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기록은 결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손은 자꾸 결론 쪽으로 기울어진다.
습관은 쉽게 꺼지지 않나보다.
나는 상처를 준다.
의도와 상관없이 그런 순간이 생긴다.
사과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그러나 사과가 가볍게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가벼워진 마음을 또 의심한다.
가볍다는 감각이 무책임으로 번역될까 봐,
마음을 다시 무겁게 만든다.
이것 또한 습관 같다.
스스로를 앞서 처벌해 두면 덜 미안할 거라는 낡은 믿음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밤은, 내가 정말로 변하고 있는지 의심된다.
낮에는 나도 모르게 바뀐다는 감각을 분명히 느꼈는데,
밤이 되면 그 감각이 흐려진다.
낮의 나는 사회적이고, 밤의 나는 회고적이다.
사회적인 나와 회고적인 나 사이의 간격이 꽤 넓다.
그 사이에서 메모를 한다.
“오늘의 나는 낮과 밤이 다르다.”
이 문장은 사실을 말하지만, 해석을 담지 않는다.
지금은 그게 맞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둔다.
누군가의 스타일을 닮아간다는 피드백을 들을 때가 있다.
나는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요즘은 그 욕망이 덜해졌다.
닮아간다는 건 최소한 멈춰 있지 않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다만 닮아가다 보면,
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잠깐 헷갈린다.
그 헷갈림이 불편하지만, 완전히 불쾌하지는 않다.
불쾌하지 않다는 말이 곧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그 중간의 말이 잘 떠오르지 않을 뿐이다.
어떤 자리에서는 말을 줄이고 표정을 본다.
상대의 숨 고르기, 손의 움직임, 고개가 기우는 각도. 그런 것들이 자막처럼 떠오른다.
자막을 읽다 보면 본편을 놓친다.
본편으로 돌아가면 자막이 사라진다.
둘 다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는 성실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만하다.
산만함을 인정하는 말도 변명처럼 들릴까 봐 조심스러워진다.
가끔은 나에게도 말하지 않고 싶은 마음이 있다.
말하지 않으면 상처를 덜 줄 수 있을까.
덜 주는 동안, 나는 상처를 덜 받을까.
침묵과 회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도,
둘을 쉽게 섞어 쓴다.
오늘의 침묵이 내일의 회피로 가는 다리인지,
아니면 잠시 머무는 쉼터인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문장을 쓰고 나면,
문장 자체가 면죄부처럼 보일 때가 있다.
“너는 너무 솔직해.” 이 말을 몇 번 들었다.
처음에는 그 말의 정확한 뜻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채로 며칠을 보냈다.
나는 스스로에게 “너무”라는 부사를 붙여 본다.
너무 솔직하고, 너무 묻고, 너무 빨리 후회한다.
부사가 붙는 지점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명확해서 좋고,
다른 한편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어느 날은 부사를 떼어내 보는 연습을 한다.
솔직하다, 묻는다, 후회한다.
단어가 가벼워지면, 마음이 조금 낫다.
하지만 오래가지가 않는다.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아 올린 주제를,
나는 때로 너무 세게 잡아당긴다.
그렇게 해서라도 열고 싶었던 문들이 있었다.
열고 나면,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을 때가 많았다.
빈 방을 확인해 놓고도,
열어 본 행위 자체를 의미로 삼으려는 버릇이 있다.
의미를 찾을수록 행동은 정당해지고,
정당해질수록 반성은 얇아진다.
그 얇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오면,
다시 묻는 것을 멈춘다.
멈추고 있으면, 또 내가 사라지는 것 같다.
같은 자리를 빙빙 돈다.
나는 지금의 나를 미숙하다고 부른다.
미숙하다는 단어가 편하다.
부족하다는 말보다 덜 가혹하고,
미완보다는 덜 낭만적이다.
미숙은 진행형이다.
진행형이라는 말에는 낙관도 비관도 없다.
오늘은 그게 필요하다.
누군가는 과정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변명이라고 부를 것이다.
두 단어 모두 틀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어느 쪽으로도 서지 않기로 한다.
가끔 나를 아끼는 사람과의 거리에서 균형을 잃는다.
너무 가까워지면 상대의 호흡에 내 호흡이 끌려가고,
멀어지면 내 목소리가 작아진다.
적당한 거리가 분명히 있을 텐데,
머리로 그린 거리는 실제로 서 보면 다르다는 사실이 고통스럽다.
그 차이를 알면서도,
오늘은 서 보지 않는다.
서 보지 않는 선택도 기록해 둔다.
나는 결론을 좋아한다.
결론을 쓰면 안정된다.
오늘은 결론을 쓰지 않겠다고 아침에 다짐했다.
다짐을 저녁까지 붙들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확신이 없다는 사실도 같이 적어 둔다.
확신 없는 문장이 모여서 하나의 하루가 된다.
모아진 하루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아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설득력이 꼭 필요한지조차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손이 ‘그러니까’라는 접속사를 찾았다.
그 접속사를 붙이면 방향이 생긴다.
방향이 생기면 누군가를 데려갈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데려가지 않겠다.
각자 알아서 걸을 수 있게, 여기까지만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