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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유수 (靑山流水)

막힘없이 썩 잘하는 말.

by 싱숭생숭


원래는 심리학과를 찾았다.

학교 홈페이지 검색창에 ‘심리학과’를 치고 엔터를 눌렀을 때,

결과창이 말없이 멈춰 있던 그 빈 화면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난다.

“운이 없지.”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머릿속은 쉽게 닫히지 않았다.

지도에서 사라진 역을 보고도 발걸음은 계속 걷는 것처럼, 나는 다른 역명을 더듬었다.

사회복지학과.

처음엔 환승역처럼 보였다.

목적지에 바로 데려다주지 못하는,

어쩐지 번거로운 갈아타기.

그런데 플랫폼에 서서 풍경을 더 오래 보니, 이

선로가 생각보다 멀리,

그리고 넓게 뻗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강의계획서를 펼쳤다.

장바구니에 대충 담아 보려던 탭이 자꾸 확대되었다.

교실에서 배우는 말이 병원으로 이어지고,

지역으로 퍼지고,

정책의 문장을 스친다는 설명들이 눈에 박혔다.

나는 메뉴판을 훑듯 과목명을 나열하는 대신,

그 과목들이 서로 어떤 모양의 연결선을 그리고 있는지 보기 시작했다.

상담에서 시작한 문장이 사례관리로 이어지고,

위기개입에서 익힌 몸짓이 학교와 마을에서 다시 사용되는 흐름.

이건 우회가 아니라 다른 진입로 같았다.

넓은 대로가 아닌,

오래 걸어야 하지만 숨이 덜 차는 골목길.

그 길이 내 호흡과 더 맞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들었다.

“그래도 네임벨류가 있잖아.”

내 안의 검증관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구에서 사람을 설득하는 데 필요한 간판이 있는 건 사실이다.

동시에 출구에서 사람을 설득하는 데 필요한 것은 간판이 아니라 내용이라는 것도 사실에 가깝다.

사회복지를 놓고 보면 그 경계가 유난히 또렷했다.

교실의 문장을 현장에서 다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루프,

배우는 말이 곧 사람 앞에서 시험되는 구조,

그리고 실패를 다음 시간표로 돌려 고치는 리듬.

입결로 줄 세웠을 때 보이지 않던 두께와 속도가,

출구 쪽에서 비로소 손에 잡혔다.

교수진 이야기로 길게 힘을 주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런 장면만 적어두려고 한다.

교수 소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바다 건너 대학 이름들이 조용히 등장한다.

어느 한곳으로 몰린 편향이 아니라,

분야마다 다른 바늘로 천을 촘촘히 박은 느낌.

이론과 실천 사이를 오가며 생기는 통로가 개인의 인맥을 넘어 학과의 습관이 되었을 때,

학생이 얻는 건 ‘특정 교수에게서 무엇을 배웠다’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연결하는 법을 배웠다’라는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그 태도의 기미를 읽었다.

학회 공지에서, 실습 연계 안내에서, 콜로키움의 단정한 제목들에서.

입시는 숫자의 언어로 우리를 학생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현장은 숫자의 언어만으로 우리를 실무자로 만들지 않는다.

나는 이 간극을 뒤늦게 배웠다.

시험에서는 문제를 끝까지 풀고 정답을 찾는 기술이 중요하지만,

사람 앞에서는 정답표를 미리 덮을 줄 아는 시간 감각이 더 자주 필요하다는 것을.

더 늦게 묻고, 더 천천히 듣고,

불완전한 답 사이에서 다음 만남의 사다리를 걸어 놓는 일.

사회복지는 이런 종류의 ‘속도 교육’을 진지하게 다루는 전공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게 내가 처음 심리학과에서 찾고 싶었던 어떤 것과 정확히 겹쳤다.

나는 며칠 동안 스스로에게 실험을 거듭했다.

강의계획서의 분량이 많을수록,

더 짧게 메모하기.

화려한 단어를 만날수록,

구체적인 장면 하나를 떠올리기.

‘정신건강’이라는 표제를 보면 ‘의자 두 개, 물 컵 하나, 그리고 잠깐의 침묵’ 같은 이미지로 바꾸기.

그렇게 바꿔 적다 보니,

내 노트는 자연스럽게 사회복지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학과명이 아니라 호흡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돌아보니, 내가 이 길을 ‘환승’이라고 불렀던 말 자체가 서서히 낡아지고 있었다.

같은 선로 위의 다른 이름,

혹은 같은 목적지의 다른 접근각.

부르는 말이 바뀌니 마음이 다르게 움직였다.

여기에 한 가지 솔직한 사실을 덧붙인다.

복수전공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래도 행정 안내를 천천히 읽어보니,

우리 학교의 복수전공 요건은 비교적 문턱이 낮은 편이라는 내 체감이 생겼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쉽다’가 아니라 ‘가능하다’는 감각.

그 가능성이 사람의 마음을 꽤 많이 지탱한다.

문턱의 높낮이는 숫자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의 무게를 바꾼다.

그 무게가 한 번 가벼워지면,

망설임의 문장들이 짧아지고, 시도는 조금 빨라진다.

선택이 가능한 상태가 우리를 덜 상하게 한다.

한편, 나는 우상화의 함정도 경계한다.

어떤 전공이든,

어떤 학교든,

교실의 조도와 현장의 조도 사이에는 그림자가 생긴다.

숭실대 사회복지학과가 ‘숨은 맛집’처럼 보인다고 해서 모든 그릇이 늘 완벽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간판보다 주방이 더 성실한 집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성실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맛을 균일하게 만든다는 믿음에 가깝다.

믿음이라고 쓰고 ‘관찰’이라고 읽어도 좋다.

공지의 누적, 졸업생 흐름의 방향,

실습처의 이름이 바뀌어도 유지되는 기본기의 흔적들.

이것들이 쌓여서 한 학과의 체온을 만든다.

어느 날은 이런 하루를 상상한다.

오전엔 ‘면담과 기록’ 수업에서 질문의 길이를 줄이는 연습을 하고,

오후엔 협약 기관의 관찰실에서 실제 면담을 지켜본다.

“오늘은 답을 서두르지 말자.”

마음속에 그 문장을 세 번 적고 들어가면,

내가 던지는 질문의 첫 음절이 달라진다.

저녁엔 도서관 구석에서 같은 주제를 다시 읽는다.

이론서의 문장이 낮에 만난 사람의 표정과 겹친다.

나는 그 겹침을 학습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그날 자정,

침대 위에서 내일의 속도를 적는다.

“조금 더 느리게.”

그럼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

“왜 우리 학교엔 심리학과가 없지?”

그 질문은 여전히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작은 문장을 덧붙인다.

“그 대신 내가 사회복지학과를 통해 심리의 현장으로 들어갈 가능성.”

이 문장은 사실이 될 수도 있고, 수정될 수도 있다.

아직 복수전공은 미확정이고,

갈짓자 걸음도 많을 것이다.

다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해석의 방향’이다.

같은 풍경도 프레임을 달리 걸면 다른 지도가 된다.

지도를 바꿔 들고 같은 길을 걸을 때, 몸이 덜 지친다.

그 차이를 나는 요즘 배우는 중이다.

나는 이제 ‘운이 없지’ 대신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 말은 고집이 아니라 태도다.

막막함을 억지로 긍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막막함을 펼쳐서 읽는 방식.

간판을 붙드는 손을 잠깐 내려놓고,

주방의 불을 한 번 더 보는 습관.

사회복지학과를 통해 알게 된 건 결국 그런 종류의 시선이다.

우회로로 들어섰다가,

정면을 발견하는 일.

아직 멀리 가보진 않았지만, 발끝의 각도가 달라졌다.

이 각도라면,

내가 처음 찾던 것—사람을 이해하는 법, 말의 길이를 조절하는 법, 기다림의 시간을 버티는 법에 결국 닿을 수 있겠다 싶다.

이 글을 마치며 내 메모장 첫 줄에 적는다.

“간판은 입구의 언어, 내용은 출구의 언어.”

나는 두 언어를 함께 배울 것이다.

입구에서 주저하지 않고 설명하는 법,

출구에서 조용히 증명하는 법.

사회복지학과는 지금 내게 그 훈련장을 빌려준다.

숨은 맛집처럼 요란하지 않게, 그러나 꾸준히.

언젠가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속도를 덜 재촉할 수 있다면,

그 시작은 오늘의 이 작은 환승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운이 없다고 여겼던 빈칸이,

이렇게 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은, 생각보다 멀리 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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