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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실실 (虛虛實實)

비어 있는 듯하면서도 채워져 있는 상태.

by 싱숭생숭


나는 ‘사람 한 명’보다 ‘한 사람의 궤적’을 닮고 싶다.

윌리엄 글래서를 처음 검색창에 띄워놓던 밤,

별건 아니었다.

“현실치료, 선택이론”와 같은 키워드가 강의계획서에 계속 보이길래, 그 이름을 더듬어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첫 단락에서 내 눈이 멈췄다.

1945년, 화학공학 학사.

전공을 옮겨 임상심리를 거치고,

1953년에 의사가 되었다는 경로.

공학에서 마음으로,

숫자에서 사람으로.

이 짧은 문장이 내 방향을 정당화해 주는 말처럼 박혔다.

공대생이 상담으로 넘어가는 내 지금이,

엉뚱한 우회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조심스러운 확신.

그가 실제로 그 길을 걸었다는 서술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글래서는 케이스 웨스턴에서 화학공학을 먼저 공부했고, 이후 임상심리와 의학으로 이어 갔다.

그 후의 페이지들을 넘기다 보니,

언젠가 병원 울타리 바깥에서 캘리포니아 벤투라의 소녀원 학교.

바로 그곳이 자기 생각을 시험하기 시작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현실치료’라고 이름 붙여질 씨앗들이 거기서 싹텄다고 한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본다.

교과서보다 교실,

논문보다 복도,

주류 문법의 보호막을 내려놓고 실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움직임.

나 역시 그 어딘가,

열람실의 문장과 지하 강의실의 몽롱함 사이를 오가며, 현장으로 내려오는 것의 무게를 배우는 중이다.

나를 잡아당긴 건 이론보다 동선이었다.

어떤 이는 누구의 사상에 끌린다고 말하겠지만,

내 경우는 한 사람의 진로 그래프에 끌렸다고 말하는 편이 더 가깝다.

공정도처럼 생긴 그래프였다.

좌측엔 화학공학의 기호들이 있고,

우측엔 상담 장면의 말풍선이 있고,

그 사이를 묶는 건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선택”이라는 간단한 화살표 하나.

글래서는 사람을 과거의 이야기 속에만 묶어두지 않고,

지금의 선택과 관계에 무게를 더 두었다.

이 방향성은 그의 기관을 통해 정리된 문장들.

다섯 가지 기본욕구, ‘질적 세계(Quality World)’,

총체적 행동에서도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교과서 용어로 붙잡기보다,

내 하루의 습관으로 풀어보려 한다.

어느 날엔 이런 일이 있었다.

실험실에서 실험 과제를 하던 시절이 자꾸 머리를 든다.

안전밸브를 하나 더 달면 압력이 어느 지점에서 풀리고, 온도를 몇 도만 낮춰도 반응이 달라지던 그 감각.

사람 사이의 온도와 압력도 비슷하게 작동할 때가 있다는 걸 뒤늦게 배운다.

상대의 마음을 ‘내가’ 바꾸겠다는 야심 대신,

내 쪽의 밸브를 조절하는 루틴,

말의 속도를 바꾸는 온도 설정.

이것이 글래서를 읽으며 내게 생긴 작은 변화이지 않을까.

이론을 외웠다기보다,

언어를 운용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여기엔 위험도 있다.

“선택”이라는 단어는 어떤 날엔 잔인하다.

빈곤, 트라우마, 소수자 위치, 돌봄과 생계의 압박.

사람을 누르는 현실의 무게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네가 바꿀 수 있는 건 네 선택뿐이야”라는 말은, 상황에 따라 날카로운 칼끝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글래서를 읽을 때마다,

그 마찰계수를 함께 떠올리려 한다.

선택을 말하되, 환경의 한계를 지워버리지 않는 문장.

내 쪽에서 바꿀 수 있는 몫을 분명히 하되,

지금은 도저히 바꾸기 어려운 몫을 인정하는 태도.

이 균형을 잃는 순간,

상담의 언어는 도덕 심판이 되지 않을까.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면,

나는 그를 우상처럼 떠받들 생각이 없다.

차라리 “방법으로서의 사람”에 가깝다.

사람은 복제되지 않지만, 방식은 이식될 수 있으니까.

그 방식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외적 통제로는 관계가 부서진다.

결국 내가 건드릴 수 있는 건 내 행동과 선택이다.

과거의 지도는 참고하되,

오늘 걸어야 할 길은 오늘 그린다.

그의 기관에서 정리한 “다섯 가지 욕구”,

생존, 사랑·소속, 힘·성취, 자유, 즐거움이라는 목록을 나열하지 않더라도,

나는 요즘 내 일상에서 이 필요들을 감각적으로 더듬는다.

누구와 함께 있고 싶은가,

무엇을 해낼 때 살아있다고 느끼는가,

어디까지 내 방식으로 숨 쉬고 싶은가.

질문들이 몸에 배면,

답들은 생각보다 빨리 고개를 든다.

이쯤에서 나와 그의 차이를 말해두고 싶다.

그는 1960년대의 병원과 학교에서 자기 방식을 세웠고,

나는 2020년대의 초연결 환경에서 첫 발을 떼는 학생이다.

그는 수십 권의 책으로 자신을 설명했고,

나는 아직 한 단락을 겨우 더듬는다.

그러나 닮은 구간이 있다.

출발점의 낯섦을 기꺼이 감수했다는 점.

공학이라는 견고한 세계를 떠나 심리로 건너오는 일은 적어도 내겐 자존심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고갯길이었다.

그때 내 화면에 “화학공학 임상심리 정신과”라는 타임라인이 켜졌다는 사실은,

터무니없이 사소한 우연이면서도 내겐 충분한 신호였다.

나는 요즘 내 스스로에게 말을 고치는 연습을 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대신 “나는 이런 선택을 반복해 왔어”라고.

전자는 본질을 묶고, 후자는 과정의 여지를 남긴다.

작은 차이 같지만,

어느 날엔 이 말 한 줄이 내 하루의 방식을 바꿔놓는다.

누군가의 연락에 충동적으로 휘둘리고,

내 기분을 정당화하는 데 급급하던 순간에서,

문장을 한 번 머금는 순간으로.

나는 그것을 ‘자기 억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기 운용이라는 표현이 더 맞다.

공학에서 배운 건식의 정밀함이 상담의 따뜻함과 모순되지 않는 지점, 나는 바로 그 접점을 배워가는 중이다.

한편으로, 그가 병원에서의 갈등을 겪고 현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들을 읽으며,

내게도 질문이 하나 생겼다.

내가 제도 안에서 버틸 힘이 있는가.

아니면 언젠가 나도 제도 밖의 언어를 배우게 될까.

글래서가 주류 정신의학의 어떤 전제들과 거리를 두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단단했다기보다 방향을 바꾸는 용기를 택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 부분은 엇갈리는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그가 벤투라의 교실에서 다시 출발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나에게는 그 사실 하나면 충분하다.

언어는 현장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니 내가 그를 “닮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얼굴 없는 야망이 아니다.

길을 닮고 싶다는 뜻이다.

공학의 정밀함으로 사람의 하루를 관찰하고,

상담의 언어로 그 하루의 관계들을 견디게 하고,

사회복지의 시선으로 안전망의 구멍을 메워 가는 일.

그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 누군가가 내 앞에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 이렇게 무너져요.”

그때 나는 글래서에게서 빌려 온 한 문장을 세탁해서 건네고 싶다.

지금 여기에서 바꿀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아주 작아도 좋으니,

오늘만 쓸 수 있는 선택 하나를 같이 고르면 어떨까요.

이 말은 기적의 주문이 아니다.

다만 도망치지 않겠다는 우리만의 작은 합의다.

밤이 더 깊어지면,

나는 가끔 그 첫 페이지를 다시 열어본다.

화학공학이라는 단어, 그 뒤에 이어지는 심리와 의학,

그리고 벤투라의 소녀원.

내 화면 속 그 세 개의 점이 오늘도 내 노트를 밀어준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아직 얻어맞을 질문이 많고,

내가 하는 말의 절반은 내게도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우연의 일치를 믿고 싶다.

누군가의 전공이 나와 겹쳤다는 사소한 사실이,

내게는 방향을 밀어준 사건이었다는 것을.

나는 “글래서처럼”이라는 말 대신,

“그가 걸은 방식처럼”이라고 중얼거린다.

내 방식은 틀릴 수도 있고,

내 선택은 내일이면 바뀔 수도 있다.

그래도 오늘의 나에게 이 문장은 충분히 정확하다.

나는 한 사람을 닮는 대신,

그 사람이 만든 길의 온도를 닮아가고 있다.


+) 근황

저는 요즘 꽹과리도 치고, 운동도 하는 등.

전공 공부 빼고 다 자유롭게 하니 훨씬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같이 수업 듣는 친구에게는 진로를 바꿨다며 학교를 가끔씩 가지 않는 순간이 오면, 괜스레 미안해기도 하지만 일단은 나를 먼저 봐줘야 하는 시기이기에 나의 선택을 하기로 했어요.

마음이 뒤죽박죽,

지독한 악몽과 혼란 속에서의 나는 너무나도 연약한데,

사람들을 만나면 애써 포장하는 내 모습에 또 겁이 나서 그런가,

굳이 나서서 사람을 만나지는 않고 있어요.

그럼에도 다가오며 연락을 하는 몇몇 친구들에게는 어떤 감사를 주어야 할 지 감이 잘 안오네요.

고맙다는 말도 익숙해지면 안되니깐요.

스스로의 최선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너무 어렵나 봐요.

그래도, 그래도.

예전에는 좋은 사람이 되길 간절히 원했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음들이,

이제는 많이 내려놓았나봐요.

약 덕분인지,

운동 덕분인지,

음악 덕분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이 사실은 잘 변하지 않더라구요.

약을 먹어도,

운동을 해도,

음악을 들어도,

나는 워낙 생각이 많은 사람이란 걸.

그걸 탓했던 과거와 달리,

나는 이런 사람이란 걸 이해해주기로 하는 시선의 변화가 큰 덕일까요?

최근에 읽은 책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어요.

우리는 너무나도 불완전해서 항상 같은 태도로 매순간마다 유지할 수 없다고.

그 누가 그럴 수 있을까요? 무조건적인 사랑도 결국 유한하기에 온전할 수 없는 것을 모두가 잘 알겠죠.

다만, 사랑하는 이나 친한 이들에게는 그 순간만이 기록하는 특정한 태도로 대한다는 것.

본디 불완전해도 누군가가 있기에,

그 순간이 하나의 행복한 가면일지라도 그 순간이 떠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그 순간을 즐기는게 불완전한 인생을 재미있게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거라고.

언제부터 우리는 영원한 걸 추구하면서 좇는 분위기가 되었을까요.

그래서 저는 더더욱 이 불완전함에 대해 직면하려구요.

밤을 새서라도,

내가 다치더라도,

시간이 오래걸리더라도,

이 탐구의 끝을 파헤치려구요.

일말의 후회 없이.

그리고 기록하려구요.

사고를 묻어두기보다는 드러내는게 왜 욕을 먹어야 하나요.

싫으면 싫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외로우면 외롭다고 말하는게,

어느 순간에는 특정 감정들이 요동치는 이 순간을 우린 의지 문제라며 계속 숨겨야 할까요?

누군가에게 새로운 이정표가, 혹은 내면에 감춰뒀던 생각들을 상기시킬 수 있다면 그 역할을 자처하고 싶어요.

이 고집과 아집 사이에서 저는 뒤흔들리면서 감각을 느껴보고 싶어요.

저도 사람인지라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괴로워요.

정신이 아득바득 살려달라 소리쳐도 오늘의 약을 털어넣는 내 모습이, 왜이리 버거워 보일까요.

누가 강요하지도 않은 이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나는 계속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요.

그럼에도, 알면서도 하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우연이 운명이 되고,

갈림길에서 유연한 곡선으로 변하는 길을 그려주고 싶어요.

그렇다고 당장 인정받고 싶지는 않아요.

오히려 뒤늦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단기간에 드라마틱하게 변하지 말고,

천천히 모두가 자각할 수 있는 변화가 되었으면 해요.

이 삶에 대해 기대를 놓았다가도 놓지 않은 내 모습이,

다수의 사람에게 실망하면서도 미련이 남는 내 모습이,

영원한 걸 꿈꾸면서도 말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모습이,

남들에겐 이상적인 것을 꿈꾸면서도 정작 나는 나의 부모님께는 적용시키지 못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모순적이잖아요.

그러니 더욱더 놓지 않으려구요.

이 공허와 허무의 끝이 절망일 수도, 분노일 수도, 슬픔일 수도 있겠지만,

역설적이게 제 끝에는 충분하다는 만족이 들어있었으면 해요.

오늘도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

항상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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