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뜻을 끝까지 밀고 감.
27번째 상담. 상담선생님이 처음으로 내게 경외심이 든다고 직접 언급한 날.
가까운 근황과 함께 메일 투고 하나둘 결과 나오는 중이라고 말씀드리고,
이제는 신경 쓰기보다는 과몰입의 끝을 겪어보았으니 앞으로 과몰입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의 심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말했다.
그리고, 긴 추석 연휴라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나는 아빠에게 또 집을 못 간다는 말을 하면서도 불편해하고 불안하다고 말한 뒤,
아빠와의 전화 속 아빠가 또 농담 어조로 “너는 가족이 없나~ 와라”라는 말에 그저 나는 그때 상황 보고 연락 다시 주겠다며 보류했다고.
정작 나는 4박 5일간 홀로 인천 바다 보러 에어비앤비로 숙소도 잡아놨는데.
너무 솔직한 감정에 대해서는 물론 균형이 중요한 걸 알고 있지만,
과거의 나는 너무 숨기려고만 했고,
이번에는 솔직하게 다 드러내고 점점 그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기 위해 조절하지 않을까라며 현재 내 상태에 대한 혼란함을 말했다.
친구는 “상대의 감정도 생각하면 너무 솔직한 건 또 좋지 않다”라는 피드백을 줬고,
그 말 앞에서 잠시 주춤했다.
오늘 당일, 갑자기 드럼에 대해 찾아보더니만 덜컥 기숙사 근처 실용음악학원에 예약을 잡아 드럼을 배우기로 했다.
최근에 풍물동아리에 들어가 꽹과리도 배우고 있다.
선택의 폭을 점점 찾아나가고 있는 중인건 알지만 모든게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이게 정상이지 않은가.
줄어든 건 전공 공부,
즉 학업에 대한 압박감을 놓아버렸다는 것.
졸업 요건을 맞췄다는 오만한 생각인지,
아니면 흥미도 없이 질질 끌어버린 전공을 개운하게 털어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부담감이 사라져 학교도 잘 안 나가게 됐다.
안 나가는 이유는 이전보다 더더욱 혼란스러운 감정을 붙들고,
모순적인 상황과 양가감정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자연스레 수업을 가벼이 여겨 빠지게 되는 것.
이런 수면 패턴에 대해서도 친구가 걱정을 했다.
약을 먹어도,
운동을 해도,
악기를 배워도.
정작 나는 내가 말했던 ‘긍정적 회피’를 몸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말한 ‘감정에 대한 직면’을 이야기하려면 나부터 회피를 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싶은 모순이 갈등으로 남았다.
나는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가식적인 사람인지 흔들린다.
나는 겸손한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혐오에 빠진 사람인지 흔들린다.
타인을 논하기도 전에 정작 내 부모에겐 적용하지 못하는 사람인지 흔들린다.
내 사명감이라는 게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고결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역시 흔들린다.
그래서 이런 혼란에 빠지는 내가 사람들을 공감하고 이해하려면 모든 감정에 직면해야 한다고 믿는다.
마음의 벽이 두터워진 현 사회에서 한 사람이 속마음을 자연스레 터놓으려면 감정의 연결이 필요하고,
그 방법이 바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가능한 한 촘촘하게 느껴보려는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혼란과 공허와 괴로움의 감정을 놓지 않으려 한다.
친구가 이해하지 않는다며,
“그냥 행복하게 살 수도 있는 사람인데 왜 우울을 끝까지 붙들어 매느냐”라고 물었을 때도,
나는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답했다.
그저 내 사명감이 이런 것 같다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삶의 목적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모든 감정을 붙들고 하나하나 해체해야 내 의의를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도,
정작 한 사람이 모든 감정을 이해하기란 이성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이룰 수 없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 앞에서 또 혼란스럽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은 내가 꿈꾸는 이상과는 멀어지고,
그래서 더 마음을 조급하게 가져야만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그러나 조급하게 다가갈수록 오히려 멀어지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사실도 더 알게 되어,
그로 인해 생기는 모순까지 감당해야 한다.
결국 그들이 스스로 나를 하나의 임상 케이스처럼 보고,
자기 안에서 어떤 깨달음에 닿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기다림을 나는 조급함 없이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인가,
천천히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혼란이 따라온다.
심지어 내가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다 하더라도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정말 무책임할 수 있겠지만,
이 혼란함을 안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인위적이지 않은 결말이라면 그렇게 하겠다고,
그래야 스스로에 대한 후회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또, 그러다가도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하면 죄책감이 몰려온다.
내 마음도, 내 감정도 잘 모르겠다.
아직 어리고 너무 미숙하다고 말해야할까.
상담선생님은 이 감정을 계속 기록하고 직면한다는 사실에서 경외심이 든다고 했다.
가만히 들어주는 게 최선이라는 말씀에 내가 얼마나 혼란을 안고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많은 내담자와 상담해 온 사람에게도 이런 공백이 필요하겠지.
그럼 나는 이 공백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혼란까지 겹쳐진다.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머릿속의 이상이 너무 커서,
그러기엔 현실을 너무 자각해버린 탓일까.
그 간극이 너무 커서 내가 하는 일에는 가치를 작게 둘 수밖에 없었나 보다.
그게 겸손인지,
자기혐오인지 모를 외줄을 타며,
스스로가 좋은 사람인지 가식적인 사람인지 재단한다.
추 1g에 따라 기울어지는 마음의 저울이 오락가락하는 내 심정에 나도 답답하다.
내 주변 사람들은 오죽하겠나.
그래도 이 혼란을 기록하고,
정의하고, 뜯어 해부해 두어야 한다.
언젠가 다른 누군가가 이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참고할 수 있는 선례가 되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 이유.
아마 지금이 그 시기라서일 것이다.
현실에 치여 좋은 생각을 하기에도 벅차고,
부정적인 생각까지 떠안으면 스스로를 잃기 쉬운 사람들이 많은 현실 사회와 대비해,
나는 아직 비교적 자유롭고 스스로의 결정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결론에 도달한 속도도 나에게는 빠른 편이다.
그래서 ‘이 순간밖에 없다’라고 생각해 급해진다.
빠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급하다.
균형을 잃어도 좋다는 것이다.
시도라도 족하다는 생각이 맴돈다.
모순덩어리인 이 삶이,
다른 누군가에겐 지옥 같은 나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감정은 다시 올라온다.
나의 최종 이상에 다가갈 수 있을지 스스로가 겁나고 무섭다.
그래도, 그럼에도 해야만 한다.
철학의 끝은 대부분 절망이라고 하던가.
내 인생의 끝은 후회가 없었으면 한다.
온전히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책임의 결과로 이어지길.
그리고 하나를 덧붙여 둔다.
나중에 ‘죽음’에 대해 논할 때,
누군가가 비판적인 시선을 내기 전에,
내가 먼저 가능한 모든 감정에 끝까지 직면해 본 사람으로서 말하고 싶다.
내 말이 방어가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언어라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를 납득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혼란을 성급히 봉합하지 않고, 끝까지 관찰하고 샅샅이 기록할 것이다.